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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층동향

네가지 이야기로 돌아본 서장 75년간의 창상지변

2026년 10월 19일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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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를 겪어본 사람만이 봄의 따스함을 안다.

75년전, 서장의 평화적 해방과 함께 고원은 새로운 력사를 열게 되였다. 이어 민주개혁의 거센 물결 속에 천년을 이어오던 농노제도가 붕괴되였다. “자신의 그림자 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던” 백만 농노들이 새 생명을 얻고 처음으로 허리를 펴고 자신만의 봄을 맞이하게 되였다.

력사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새 시대 당의 서장관리방략의 인도 아래 설역고원은 위대한 비약을 맞이했으며 신세를 바꾼 농노들은 일찍 조상들이 꿈에도 바라던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였다.

민생을 최우선으로 하고 사소한 일에도 깊은 정을 쏟았다. 교육, 문화, 취업, 의료, 양로 등 습근평 총서기가 관심해온 민생문제에 대한 정책들이 이곳에서 구체화되면서 봄날처럼 수많은 가정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최근 기자는 드넓은 고원에 심입해 서장봉건농노제하에서 생활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만나 그들한테서 공산당이 설역고원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봄을 맞이하게 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푸츠런의 이야기—

사람 인(人)자, 사람의 신세 바꿔

올해 82세 고령인 푸츠런 할아버지는 자신이 처음 배운 한자인 사람 인(人)자를 줄곧 기억하고 있다.

푸츠런은 1944년에 서장자치구 시가제시에서 태여났다. 일가족은 농노주의 한 흙벽돌집에 세들어 살았는데 여름에는 비가 새고 바람이 들이닥쳤으며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가 뼈속까지 스며들었다. 마을의 많은 농노들은 사방으로 바람이 새는 낡은 천막에서 살았으며 어떤 영아는 외양간에서 태여나 그날 밤으로 불행하게 요절했다.

“서장봉건농노제하에서 생활했던 우리는 제대로 된 사람 취급도 못받았습니다. 그냥 농노주한테 얽매여 마구 버려지기나 하는 물건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태여나서 존엄도 없었고 희망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었습니다.” 고난했던 유년 시절을 되새기면서 푸츠런은 깊은 감회에 잠겼다.

당시 옛 서장에서 인구의 95% 이상을 차지하던 농노와 노예들은 모든 생산수단을 빼앗겼으며 인신자유는 꿈꿀 수가 없었다. 사찰의 승려와 상류 귀족들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바 전사회의 문맹률이 95%에 달했다. 광범한 농노들은 대대로 글을 몰랐고 법의 리치를 몰랐으며 또한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꿈에도 모른 채 살았다.

서장이 평화적으로 해방된 후 민주개혁의 봄바람이 고원의 곳곳에 불었다. 운명의 쇠사슬에서 벗어난 푸츠런은 드디여 꿈에도 바라던 교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선생님께서는 우리한테 두획이 좌우로 서로 기대여야만 사람 인(人)자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서장민주개혁 이후 우리는 비로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서게 되였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하늘을 떠받치고 땅에 우뚝 선 참다운 인간으로 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람 인(人)는 종자처럼 푸츠런의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는 “지식은 진주나 마노보다 더 귀중합니다.”라고 말했다. 글자를 깨친 후 그는 쉼없이 학업에 정진했다. 그는 시가제시에서 번역가로 일했고 49세에는 북경대학에 들어가 영어를 수학했으며 2007년, 환갑을 맞이한 그는 컴퓨터학습반에서 컴퓨터기초조작을 능숙하게 익혔다.

푸츠런은 “저는 이제 문맹이 아니라 정책을 리해할 수 있고 밖의 드넓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자신은 고향사람들을 위해 속마음을 털어놓을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의 실제적인 배려를 각 민족 군중들에게 전달하는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2021년 푸츠런은 서장백만농노해방기념관의 의무해설원이 되였다. 매년 3월 28일, 서장인민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이 특별한 날이 되면 그는 언제나 깔끔한 장족복장을 입고 일찍 기념관을 찾는다. 기념관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이 력사는 가슴 아픈 과거이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그 고난했던 력사를 몸소 겪었기에 있는 그대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후손들이 지금의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아끼며 살아가도록 일깨워줄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군 한다.

이외에 푸츠런은 또 라싸시사범학교 부속소학교의 교외도덕품성양성보도원이다. 다년간 그는 학생들에게 시대의 변천을 이야기해주며 소년아동들이 력사를 명기하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그는 “아이들이 꼭 리해했으면 하는 두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와 가정’입니다. 안정된 국가가 없으면 평안한 가정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국가는 단순히 교과서에 나오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 일생에서의 가장 튼튼한 버팀목입니다.”라고 말했다.

사람 인‘人’자를 깨치는 데로부터 평생을 바쳐 당당한 삶을 일궈낸 푸츠런의 긴 인생은 바로 설역고원의 거대한 변화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일 뿐만 아니라 더우기 백만 농노들이 신체적 해방에서 정신적 각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측면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배움의 기회조차 없던 데로부터 학문을 중시하는 데 이르기까지, 문맹률이 95%를 초과하던 데로부터 15년 공비교육을 전면적으로 시행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75년간의 분발정진을 통해 서장은 완비된 현대교육체계를 마련함으로써 세세대대의 고원의 학생들에게 혜택을 가져다주고 있다.

푸츠런은 “오늘날의 서장은 인간세상의 위대한 기적을 창조해냈다.”라고 감탄했다.

니마왕쥬의 이야기—

쥬허줘무의 전승과 부활

“니마할아버지 쥬허줘무를 한곡 더 춰주세요!”

서장자치구 산남시 춍갸이현의 산간마을에 놓인 소가죽 대북 곁에서 아이들이 팔순된 니마왕쥬를 둘러싸고 있다. 그 어린 얼굴마다에는 간절한 기대감이 서려있었다.

북채를 내리칠 때마다 깊고 웅장한 북소리가 산야에 울려퍼졌다. 국가급무형문화유산 서장 ‘쥬허줘무’의 대표적 전승자인 니마왕쥬할아버지는 팔순 고령이지만 여전히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넉넉한 장족두루마기 밑자락이 그의 유려한 춤사위를 따라 서서히 휘날렸다.

천여년의 력사를 지닌 쥬허줘무는 고원민속을 그대로 보존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어둠이 드리워졌던 옛 서장에서 예술은 무용수들의 것이 아니였다. 오직 권세자들의 유희를 위한 수단이였으며 농노무용수들은 마음대로 부려지고 빚을 갚는 존재에 불과했다.

당시 어린 니마왕쥬는 농노주가 마음대로 부려먹던 농노였으며 쥬허줘무를 추는 것은 빚을 갚기 위한 무상로역이였다. “옛날 사찰에 가서 춤을 추는 것은 그저 빚을 갚고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는 것이였습니다. 높은 단상 우에 있는 농노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기만 했습니다. 노래든 춤사위든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먹을 것은커녕 매를 맞고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일년 내내 억지로 재주를 피우던 세월 속에서 그는 종일 불안에 떨며 살았다. 우렁차고 뜨거웠어야 할 북소리는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였고 생동감 넘치고 여유롭게 펼쳐지는 춤사위는 신체의 자유를 묶어두는 차가운 족쇄로 전락되고 말았다.

천지개벽의 변화는 민주개혁의 시작과 함께 찾아왔다. 그해 공산당은 니마왕쥬의 가정에 식량, 밭과 집을 나누어주었다. 세세대대 농노주에게 목숨을 의탁하며 살아야 했던 고통은 드디여 막을 내렸다. 천년을 이어온 쥬허줘무도 백만 농노들과 함께 새 생명을 얻으며 부활을 맞이했다.

그후 니마왕쥬는 문예단에 합류해 춤을 추며 당당하게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는 농노주들을 위해 고된 부역으로 춤을 췄지만 지금은 고향사람들을 위해 춤을 춥니다. 그 순간 비로소 춤을 추는 것이 얼마나 존엄있는 일인지 절실하게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

2014년, 쥬허줘무는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대표적 항목명단에 성공적으로 이름을 올렸는바 체계적으로 보호되고 전민에게 속하는 소중한 민족문화유산이 되였다. 다년간 로인은 80여명의 젊은 쥬허줘무 전승자들을 알심 들여 양성했으며 상시적으로 무형문화유산 학교보급활동, 기층공익공연활동을 전개했는바 깊은 산속에 묻혀있고 력사가 유구한 쥬허줘무가 전국에 널리 전해지도록 했다.

그는 “지금 춤 추는 것은 삶이 행복하고 마음이 즐거워서입니다. 쥬허줘무를 진심으로 좋아해서 추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너희들은 정말 좋은 시대에 태여났어. 이렇게 좋은 조건과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 기회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옆에서 열심히 춤을 배우는 아이와 제자들을 향해 이 말을 하는 그의 얼굴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2025년말까지 서장의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대표성 종목은 106개에 달했다. 천년 탁무의 변천은 서장 문화발전의 진실한 축소판이다. 문화는 더 이상 권세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민이 공동으로 만들고 향유하는 정신적 재부로 되였으며 유구한 문맥은 새 시대에 이르러 진정으로 대가 끊이지 않고 세세대대로 이어 전승하게 되였다.

바이마의 이야기—

한오리의 실로 희망을 엮다

시가제 바남현 옴도향 쌍바촌의 장족식 마당에서는 베틀 소리가 울려펴진다. 할머니에서 손녀에 이르는 3대에 걸쳐 직조기예를 이어온 바이마가족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이 한오리의 실은 고난과 새 삶의 세월을 증명하는 동시에 설역고원의 민생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비추어준다.

“할머니, 힘드시면 좀 쉬세요.” 몸을 구부리고 베를 짜는 외할머니를 바라보며 손녀 바이앙이 조용히 권고했다. 일흔이 넘은 바이마 로인은 련이어 손을 저었다. “힘들긴! 내 일을 하는데 조금도 힘들지 않아!” 소박한 감회는 두 세대의 전혀 다른 처지를 말해준다.

“옛 사회에서 모포를 짜는 것은 농노들에게 어깨를 짓누른 고역이였습니다.” 옛 서장의 농노출신인 마을의 로세대 촌민으로서 바이마는 실에 묶여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던 고난의 세월을 몸소 겪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밤낮없이 베틀 앞에 앉아 일했고 짜놓은 모포는 전부 장원주에게 바쳐야 했다. 모녀가 온 힘을 다해 하루종일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묽은 짬바 한그릇 뿐이여서 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손에 쥔 실로 짠 것은 천이 아니라 농노들의 피로와 농노들의 고통이였습니다.”

민주개혁의 도래는 바이마가족의 인생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당시 아직 어렸던 그녀는 운명을 뒤바꾼 이 거대한 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백성들을 억압하던 농노제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그녀의 집에도 집과 토지가 분배되였다. 어머니는 장원주를 위해 오랜 세월 일해온 낡은 베틀을 장원에서 자기 집 마당으로 옮겨놓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가 짜는 모든 천은 우리 자신의 것이란다. ”

“우리 어머니 세대가 손에 쥔 실은 장원주가 내려준 것으로 빚을 갚기 위한 것이였고 부역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에 이르러서는 손에 쥔 실은 스스로 집어든 것으로 생계이고 부를 도모하는 희망입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 바이마에게 직조기예를 배운 줘가가 말했다. 오늘날 모포 직조는 이미 옛날의 고난이라는 흔적을 벗어던지고 향촌의 전면적 진흥 정책에 힘입어 활기차게 발전하는 고원의 특색산업으로 되였다.

이제 이 실은 바이양에게 전해졌다. 중국공산당 당원이자 촌당지부 서기이며 향촌산업의 선도자인 젊은 바이양은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저는 이 기예를 잘 전승할 뿐만 아니라 이 한오리의 실을 더 멀리 보내고 싶습니다.”

새 시대의 물결 속에 서서 드넓은 산천과 번화한 도시를 보았고 외지에서 배우고 심화한 경험을 통해 바이양은 계승과 개혁의 결심을 더욱 굳혔다. “저는 조상에 대한 경외심과 시대에 대한 감사함를 안고 옛 기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모포가 시가제를 벗어나고 고원을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츠더킬의 이야기—

신분증 한장이 행복을 증명하다

따뜻한 해살이 산남 쌍리현 양로원의 마당을 가득 비추고 있다. 해살 아래 82세의 츠더킬 로인은 손에 든 주민신분증을 어루만지며 익숙한 곡조를 흥얼거렸다. “공산당에 감사합니다. 행복한 삶을 가져다주셨으니… 당의 은혜를 영원히 기억하고 영원히 당을 따라가겠습니다.”

마당에서 다른 로인들은 한담을 나누며 거닐거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세끼 식사가 따뜻하게 마련되여 있고 만년의 세월은 여유롭고 평온했다.

“이 신분증이 바로 저의 행복증입니다.” 츠더킬이 말했다. 로후에 부양을 받으며 안정된 만년을 보내는 것은 과거 농노제도의 굴레에 깊이 얽매여있던 옛 서장의 군중에게는 꿈에서조차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였다.

츠더킬은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어 어려서부터 구걸하며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은 겨울입니다. 제 집이 없어서 눈보라를 피할 곳도 없었고 외양간 안으로 들어가 소의 몸에 기대여 몸을 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봉건농노제도 아래에서 농노는 장원주가 마음대로 사고팔거나 양도하고 증여할 수 있는 사유재산이였다. 의지할 친척조차 없는 사람이 늙어서 로동능력을 잃으면 들판으로 내몰려 얼어죽거나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 얇은 신분증은 저에게 있어서 단순한 신분카드가 아니라 떳떳하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장원주가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사유재산에서 법적 권리와 완전한 인격을 지닌 국가 공민으로 되기까지 이 신분증 한장의 리면에는 모든 평범한 개인의 가치에 대한 존중이 담겨있다.

오늘날 양로원의 츠더킬은 자신의 만년을 편안히 보내고 있다. “여기서는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음식도 좋아 끼니마다 수유와 짬바가 있습니다. 할 일이 없으면 해볕을 쬐고 양로원의 로인들과 집안 이야기를 나누거나 궈좡춤을 추며 날마다 활기차게 지냅니다.”

고난을 몸소 겪은 차이더킬은 오늘날의 행복의 무게를 더 잘 알고 있다. “세상에 타고난 안정은 없습니다. 저의 행복은 당과 국가가 준 것입니다. 저에게는 자식도 없지만 당과 정부가 저를 이곳에 안치해주어 식사, 거주, 지료가 모두 보장되고 세상을 떠난 뒤의 일까지도 누군가 잘 돌봐줍니다.”

하나하나 실효를 거두고 있는 양로 최저보장, 의료보장, 보편적 민생 정책은 설역고원에 촘촘한 민생보장망을 엮어 수천수만의 츠더킬과 같은 로인들이 로후에 부양을 받고 병에 걸리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외양간에서 고통스럽게 버티던 삶에서 양로원 마당에서 따뜻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기까지 작은 신분증 한장은 고독하고 의지할 데 없던 한 로인의 운명역전뿐만 아니라 백만 농노의 인격과 권리가 다시 확립되였음을 보여주며 신분의 재정립, 인권의 진보, 민생의 온기를 증명하고 있다.

네가지 이야기, 네 사람의 인생. 문맹에서 글을 깨치는 데로, 속박에서 해방으로, “고통을 짜는” 것에서 “부유를 짜는” 것으로, 로숙에서 안주로—네명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인생궤적은 세계의 지붕에서 일어난 파란만장한 창상지변을 비추어준다.

가을날의 고원에는 청과가 곳간에 들어가고 대지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생기를 되찾은 이 오랜 땅은 풍성한 가을빛과 활기 넘치는 생활의 기운으로 생명의 아름다운 장으 펼쳐가고 있다. 보라—

따뜻한 해살 아래에서 푸츠런은 몸을 굽혀 아이들에게 ‘사람 인’자를 쓰는 법을 한획 한획 가르치고 있다. 니마왕주는 장포자락을 펼치고 젊은이들과 함께 노래하며 춤춘다. 바이마는 베틀을 움직이며 외손녀와 나지막이 집안 이야기를 나눈다. 츠더킬은 눈을 가늘게 뜨고 또다시 그 익숙한 곡조를 흥얼거린다. “공산당에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생활을 가져다주셨으니…”

75년 세월의 풍파를 딛고 설역고원은 인신의 해방에서 정신적 풍요에 이르기까지, 입고 먹을 것조차 부족하던 데로부터 편안히 거주하고 안정적으로 일하는 데 이르기까지, 새 시대 당의 서장을 다스리는 방략이 뿌리를 내리면서 설역대지는 끊임없이 생기를 이어가고 날로 새워로지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속하는 행복의 새 장을 계속 써나가고 있다.

“당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우리들의 좋은 나날은 청과주처럼 마실수록 향기롭습니다!” 푸츠런의 말은 고원 인민의 공통된 마음을 대변한다.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