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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정음문화칼럼194]우리네 ‘효': 그 실천과 부모-자식관계의 인류학

리화

2022년 08월 05일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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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인생중반을 훌쩍 넘기고 보니 1943년생 친정어머니 역시 어느새 여든을 바라보는 백발의 할머니가 되여계신다. 최근 몇주일 동안 병원치료에 동행하면서 유난히 서글프게 다가오는 어머니의 늙음. 몇년전까지만 해도 팔을 휘∼휘∼ 내저으면서 자식들의 도움을 마다하던 그 옛날 의사선생님의 호기로움과 쿨함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어쩌다 누려보는 딸의 그야말로 손톱눈 만큼이나 자잘한 ‘효도'에도 "내 절로 뻐스를 타고 가도 되는데, 덕분에 호강했소. 머 먹고 싶은 게 없소? 세치네탕 해줄가…"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피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누구 하나 비껴갈 수 없는 늙음으로 가득한 팔순의 어머니 모습에 문뜩 내리쳐오는 "이제부터가 효도의 본방, 그 전의껀 아무것도 아니야" 라는 매서운 채찍과 그 계시. 진정한 효도란 어떤 것일가. 그러면서 또 드는 생각 하나—효도는 자식만의 책임일가.

요즘 세월 보기 드문 효부 친구가 있다. 구순에 가까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그녀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옛날 얘기가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하기야 혹독한 시집살이에, 시댁으로부터 입은 깊은 상처 때문에, 그래서 수십년이 지나도록 그 사건사고들을 두고두고 되새기는 우리네 어머니와 할머니가 어디 한둘뿐이랴. 하다면 그네들의 원망과 미움으로 얼룩진 젊은 날들이 한낱 '효도'라는 한마디 '칭찬'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 만큼 별 게 아닌 것이였으며 그것 또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참 효도'였다고 할 수 있을가.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오고 잊음도 헤퍼지고 사고력도 흐릿해지고 마음도 한없이 약해져서 서러움만 늘어나는 로년, 어쩌면 앞으로 나의 칠십대, 팔십대도 이러할 것인데 과연 늙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곱게' 늙어가야 내 마음이 편하고 내 자식이 진정한 ‘효자효녀'가 되는, 그래서 서로에게 아름다운 인생의 마지막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가.

우리는 흔히 가족을 생물학적이고 자연적이며 본능적인 존재로 간주해왔다. 하여 오늘까지도 우리네 가족은 겹겹의 ‘신화'들로 둘러싸여있으며 그 대표적인 것으로 과도하게 포장된 사랑과 조화 그리고 똘똘 뭉치는 결속력 등을 들 수 있다. 반대로 가족 성원들간의 권력구조와 위계질서로 인한 긴장과 갈등, 증오와 리기심 따위는 무시되여버려진 채. "가족이기 때문에…","가족이니까…" 그 어떤 리타적인 희생도 감내해야 하고 또 감내할 만한 것이라고 착각해왔다.

따라서 부모와 자식 관계 역시 이와 같은 론리의 틀에 맞춰 규정되여왔으며 부모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봉사하는 무수한 ‘효'의 표상들을 만들어왔다. 설령 우리가 마주한 가족의 현실이 결코 세간의 기대와 절대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동화와 같이 조화로운 가족의 형상들이 끊임없이 서사해왔으며 심지어 세대를 뛰여넘어 이어왔다. 마치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이 자신이 겪어왔던 고된 시집살이를 ‘효'라는 이름으로 그 며느리에게 대물림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시대가 변했고 관념이 변했다. 부모와 자식 세대의 성장환경이 확연히 달라진 탓에 가치관의 차이 역시 점점 좁히기 어렵게 되였으며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소경 3년" 석삼년을 참아가면서 시집살이 할 며느리도 이제 없다.

그러고보니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만 일방적으로 강조했을 뿐 그 ‘효'를 누리는 부모로서의 바람직한 자세와 책임 운운에 대해서는 거의 담론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화두를 던지는 행위 자체가 대단히 불손한 것이고 우리의 전통미덕에 크게 어긋나는 '발칙한'것 이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외면한다 해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게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호혜적 관계성이다. 다시 말해서 부모와 자식 역시 인격체로서의 상호성을 띤 교환관계인 것이지 "원래부터 그런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래야만 하는" 고착된 관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진정 서로를 배려하고 리해하고 부단히 맞춰가는 노력이 밑받침될 때야만이 우리는 비로소 ‘효'를 살아 숨 쉬는 현실적 개념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도 변해야 하고 ‘곱게' 늙어가야 한다.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고집스럽고 주책없는 늙은이', ‘꼰대'로 괄시받지 않으려면 성인이 된 자식을 내 품에서 떠나보내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특히 이미 성가한 자식과 그 배우자에 대해서는 설사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도 필요 이상의 간섭과 조언은 잔소리일 뿐. 상대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저 피곤하고 힘들게 한다. 이제 적당히 고집도 줄이고 자식에게 지는 척 묻어가는 여유로움도 필요할 때다. 그리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지나간 세월이나 사람에 대한 끝없는 원망과 되풀이 역시 굉장한 부정적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부모자식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의 하나이므로 될수록 지양하는 게 좋다.

자식의 배우자에 대한 배려와 진정 어린 애정표현 및 신뢰관계 역시 ‘효'의 실천에 중요한 변수로 작동한다. 자기 자식이 귀한 만큼 들어오는 사람도 소중하다. 처음부터 탐탁치 않았고 긴 시간 동안 긴장과 갈등관계에 있었던 며느리나 사위가 ‘효'의 실천에 적극적일 리가 만무하며 여차하면 자식의 결혼생활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일명 가족 위챗그룹에 남편과 시부모, 시누이만 가입시켜서 "지들끼리 쑥떡쑥떡 한다"며 무척이나 서운해하고 분노하던 어떤 친구가 생각난다. 부모자식관계에 갈등이 적고 기쁨과 보람을 느낄수록 ‘효'에 대한 자식의 적극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결혼한 자식과의 친밀성을 강화하는 비결의 하나가 그 배우자와의 끈끈한 애정전선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자식의 배우자와 유쾌한 관계를 맺을 줄 아는 로년의 지혜가 필요하다.

백세시대, 예전에 비해 퍽이나 길어진 로년에 대비하는 확실한 로후대책 또한 절실하다. "우리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남의 자식들은 부모한테 이렇게 저렇게 잘하는데", 부모로서의 권위와 욕심만 잔뜩 내세우고 고마움의 표현 한마디 린색한 로인들도 종종 보이는 현실이다. 한창 치열한 삶의 현장을 살아나가느라 고달픈 우리 자식들이다. 이런저런 리유로 경제적인 여견을 마련하지 못했거나 자식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부득이한 상황이 닥쳤을 때 고마움과 미안함이라는 정서적 자원으로 부모자식 관계의 호혜성을 보완하고 자식의 진정성 있는 효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맞지 않을가.

그런가 하면 로년의 초중반 건강할 때까지 경제적인 후원 혹은 손자녀돌봄 등을 통하여 자식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는 경우가 많으며 부모자식 관계 또한 비교적 원만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너네 신세는 안 진다", "우리 걱정은 하지도 말라"고 제법 호기로운 선언을 툭툭 내던지기도 한다. 자식 역시 "우리 부모라면 얼마든지 효도할 수 있어"라고 장담. 하지만 정작 부모가 더 로쇠해지고 자식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오면 그 때에서야 비로소 부모자식 모두의 ‘효'에 대한 실질적인 고민과 갈등이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가 막연히 리상화하고 환상해왔던 ‘효', 그 실천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태여나고 성장하고 늙어가고 죽는다. 그리고 늙어서 추하게 되는 게 아니고 추한 사람이 추하게 늙어간다. ‘곱게' 늙어가는 예행연습이 필요하다.

"로인이 되기보다 어르신이 되라"는 말이 있다.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다"는 말도 있다.

우리네 ‘효', 그리고 늙음에 대해서 고민이 깊어지는 시점이다.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