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지 설정
최신 교육 과학 문화 스포츠 건강 관광 멀티미디어 포토 중국명승 특별추천 【량회특집】
이달의 칼럼

[정음문화칼럼197] 태항아리랑

전월매(천진사범대학교)

2022년 11월 07일 16:59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아리랑 노래소리는/화남에서 화북으로/널리 퍼졌고/우리의 발자취는/중국 각 전장에 /남겨있다네.

아리랑은 조선민족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아리랑은 조선민족이 머무르는 곳마다에 뿌리를 내리고 널리 울려퍼졌다. 일제강점기 조선반도가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된 후 조선인 항일투사들은 중국으로 건너왔다. 20세기 20년대에 홍범도가 거느린 독립군에 의한 봉오동전투, 홍범도와 김좌진이 거느린 련합부대와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이 주도한 청산리전투, 20세기 30년대에 리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조선의용군이 화북과 화동지역에서 팔로군, 신사군과 련합해 진행한 항일무장투쟁… 이는 중국전장에서 벌어진 굵직굵직한 항일거사들이다.

조선반도의 민족해방투쟁이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박해로 말미암아 저조기, 침체기에 처해있던 20세기 40년대에 일본군 점령지역의 항일근거지에서 활동했던 조선의용군은 적극적으로 정치, 군사, 생산 활동을 하면서 팔로군, 신사군과 련합하여 일제와 싸웠다. 특수한 력사시기에 탄생하여 중국공산당의 령도 아래 중국사회에 융합되여 항일전쟁의 최전방에서 싸운 조선의용군의 장려한 혈흔은 아아한 태항산맥이 말해주고 있다.

북경, 하북, 산서, 하남에 걸쳐있는 태항산맥은 굽이굽이 아득히 뻗어나간 험준하고 거대한 바위산맥과 웅장한 협곡으로 중국의 대협곡이라 불리운다. 태항산맥자락에 자리잡은 팔로군 총사령부를 찾아 1941년 1월 일부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태항산으로 갔다. 조선의용대는 약산 김원봉을 대장으로 1938년 10월 10일 무한 한구에서 설립된 단체로 취지는 “중국 항전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타도하고 조선혁명운동을 추진하자”이다. 조선의용군이 태항산에 갔을 때는 조선청년련합회가 팔로군 본부에 설립되여있어 그의 지도 아래 활동을 전개했다. 1941년 7월에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명하고 1942년 7월에 조선의용군으로 확대개편하였다. 조선의용군은 팔로군본부에 있다가 129사 사령부 주위로 옮겨갔으며 1943년 봄에 남장마을로 옮겨갔다. 100여명이던 대원이 그 때는 300여명이 넘었다. 1943년 하반년에 조선의용군 대부분은 연안으로 전이되고 일부만 섭현 남장마을에 남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했을 때 조선의용군은 조선에 가서 일본군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고 태항산을 떠나 동북으로 가서 해방군과 합류했다. 1946년 3월, 조선의용군은 중국해방군에 편입됨으로 자신의 력사적 사명을 다하였다.

조선의용군은 태항산에서 선후로 료현(辽县, 현 左权县), 섭현(涉县) ,원씨현(元氏县) 등지의 10여개 마을에 주둔하였는데 호가장(胡家莊), 남장(南庄) 마을, 운두저(云头底)마을, 장자령(庄子岭), 십자령( 十字嶺), 석문촌(石门村), 려성(黎城), 황북평 등 지역은 현재 항일유적지로 남아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여 싸운 애국주의교육현장이 되였다.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4년 8개월 정도 태항산에서 생활하면서 주로 무장투쟁, 반일홍보활동, 간부양성, 적후활동 등을 하였다.

조선의용군은 태항산에서 팔로군과 련합하여 일제와 벌인 항일무장투쟁에서 혁혁한 공헌을 세웠다. 특히 유명한 장자령, 십자령, 호가장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희생되였다.

1942년 5월 25일, 일제는 태항산 팔로군 총사령부에 대한 대규모 소탕작전을 벌였다.
일제의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대한 악렬한 소탕전에서 중공중앙 북방국과 팔로군본부 등 기관을 엄호하기 위하여 산서현 요현 마전 부근에서 포위망을 뚫고 이동하던 중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 장군과 일부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남태항산의 최고봉인 십자령에서 희생되였다.

장자령은 하북성 섭현 편성진 대암촌 경내에 위치해있는데 산세가 가파롭다. 1942년 5월 28일, 좌권 장군이 순국한지 사흘이 지난 뒤에 팔로군 야전정치부 신화일보사(화북지역), 로신예술학원, 조선의용군 등이 장자령으로 이동할 때 재차 일제와 격전이 벌어졌다. 조선의용군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를 상대하며 용감하게 적을 무찔렀는데 전투중에 조선의용군 지도자인 석정(1901-1942, 원명 윤세주)과 진광화(1911-1942) 등이 순국하였다. 조선의용군은 그외에도 호북회전(湖北會戰), 곤륜관(昆侖關)쟁탈전, 중조산(中條山)반소탕작전에 참여하여 공헌을 세웠고 이 과정에 많은 이들이 희생되였다.

연안의 《해방일보》는 1942년 9월 17일에 애청의 <추도사-조선독립동맹을 위하여 순국한 조선렬사들을 위한 헌시>를 실었고 1942년 9월 20일에 팔로군 주덕 총사령관의 <자유를 위해 순국했으니 영생불멸하리라>와 엽검영 참모장의 <순국한 조선의용군 동지들을 추모하며>란 추도사를 실었다. 중공중앙 북방국 기관보《신화일보》(화북지역)는 추도문에서 “중조 민족의 영령들은 생전에 손을 맞잡고 전투하였고 순국후 함께 릉원에 잠들었다”고 하였다.

그 해 10월 10일, 진기로예 항일변방지역정부의 주관하에 진기로예 항일순국렬사묘소가 섭현 석문촌 연화산에 세워졌고 동시에 팔로군 좌권 장군과 석정, 진광화 등 조선의용군 혁명렬사들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였다. 장례식에는 중국공산당 중앙북방국 대표 리대장, 팔로군 부참모장 등대원, 팔로군 야전정치국 주임 라서경, 129사단장 류백승, 정치위원 등소평, 진기로예변구정부 주석 양수봉, 조선의용군 대표 최창익을 비롯한 5천여명 군민들이 참가하였다. 그들은 렬사묘 앞에서 “중한 량국민은 긴밀히 련합하여 공동의 원쑤를 타도하자!”라고 선서하였고 양수봉은 렬사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태항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을 조성하자고 호소하였다. 장례식을 치른 뒤 “렬사전을 편찬하여 각급 학교 교과서로 사용하고 각 기관의 전통적 교재로 사용하며 각 기관의 전통적 교육재료로 삼을 것”을 결정했다. 1950년 10월에 좌권과 진광화의 묘소는 한단의 진기로예 렬사릉원으로 이장되였다.

석정은 고향이 한국 경북 밀양이다. 그는 1941년에 조선의용대를 거느리고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들어가 팔로군과 공동으로 항일하였다. 석정은 2020년 9월, 중국의 제3차 유명항일렬사명부에 올랐다. 진광화는 원명이 김창화이고 고향은 조선 평안남도 대동군이다. 그는 1938년 태항산항일근거지로 갔으며 진기로예당학교 부교장,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지도원을 담당했다.

호가장은 하북성 원씨현에 위치해있는데 석가장 시내에서 승용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1941년 12월 12일 새벽, 조선의용대 제2대 김세광 대장이 이끄는 29명 열혈전사들이 서안사변 5주년 기념대회를 위해 호가장마을 한 민가에 머물던 중 일제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팔로군의 도움없이 500명 되는 일본군 한개 대대의 포위습격에 둘러싸인 마을사람들의 피신을 엄호해냈는데 이 전투에서 분대장 손일봉(1912-1941), 대원 최철호(1915-1941), 박철동(1914-1941), 리정순(1918-1941, 왕현순) 등이 나어린 생명을 바쳤다. 중상자 2명중 김세암외에 적탄에 다리중상을 입고 일본 나카사키형무소로 압송되여 10년형을 받고 1945년 광복후 석방되여 문학창작에 전념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우리에게 친숙한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자 중국 조선족문단의 거목인 항일전쟁시기 중국공산당 당원 김학철(1916-2001, 홍성걸)이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여난 김학철은 보성고보 재학중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우리 나라 상해로 건너와 1938년에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에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였다. 1940년 가을, 그는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에 참가하였다. 김학철은 자전적인 작품 <균렬>, <무명소졸>, 《최후의 분대장》, 《항전별곡》, 《격정시대》 등을 통하여 자신의 혁명적인 삶과 력정, 인생철학을 표현하였다.

김학철외에도 호가장전투를 문학작품으로 다룬 이가 있으니 태항산에 머물렀던 유명한 작가 김사량(金史良, 1914-1950)이다. 그의 본명은 김시창, 평안남도 평양출신이다. 김사량은 1945년에 일본군의 보도반에서 탈출하여 태항산을 거쳐 연안으로 갔다. 그는 조선의용군에 가입하여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반제국주의, 국제주의를 지향했던 그는 조선의용군의 영웅적인 투쟁을 소개한 장편기행 <노마만리>, 태항산지역에서의 생활과 호가장전투를 그린 씨나리오 <호접>을 창작하였다.

호가장에는 2005년 8월에 원씨현인민정부와 연변작가협회가 공동으로 세운 <김학철 항일문학기념비>와 <김사량 항일문학기념비>가 있다. 두 항일기념비 사이의 한복판에는 정부의 단독명의로 세운 높다란 <호가장보위전 항일렬사비>가 있다. 당지 주민들의 제안에 따라 2021년 10월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일제의 공격을 받았던 민가에 <김학철문학관>을 설립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지속적으로 조직력량을 강화하고 군사자질과 정치자질을 갖춘 조선인간부들을 양성하였다. 1941년 7월 8일, 화북조선련합회 연안회의에서는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그 해 8월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팔로군본부인 산서 동욕(桐峪)에 조선의용대 간부양성반을 꾸려 무장항일투쟁의 군사간부를 양성했다. 교장은 무정이고 부교장은 진극화, 위원은 최창익, 석정, 박무, 왕지연 등이였다.

섭현 남장마을에는 마을 안쪽에 조선의용군 본부,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가 남아있다. 조선의용군이 1943년 4월에 섭현 남장촌으로 이전해 주둔하면서 1944년 9월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하게 되였다. 교육장으로는 유명한 작곡가 정률성(鄭律成, 1914-1976)이 담당했다. 일본이 1945년 8월에 투항할 때까지 2년 남짓 이곳에서는 300여명의 조선항일독립운동을 위한 핵심인물들을 길러냈다.

정률성은 전라남도 광주출신으로 1933년 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일본중국침략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연안에 가서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에서 음악교사, 로신예술학원에서 성악교사로 활동하였다. 1942년 8월에 태항산 팔로군본부에서 일하였으며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장을 담당하다가 1944년 1월에 다시 연안으로 갔다. 1938년 4월, 정률성이 창작한 <연안송>은 연안에서 전 중국으로 널리 퍼졌으며 1939년에 그가 공목(公木)과 함께 창작한 <팔로군 대합창>중의 <팔로군진행곡>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되였다. <팔로군진행곡>은 그 이후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이름이 변경되였고 1988년 7월 25일에 중공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공식 채택되였다. 정률성이 태항산에서 사용했던 우물은 유적지로 남아있다.

조선의용군 대부분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고 조선어, 중국어, 일본어 3개국어에 능통하여 항일선전활동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조선의용군의 이러한 활약은 팔로군의 중시를 받았는바 그들은 팔로군 129사 류백승 참모장과 등소평 정치위원의 수차례의 접견을 받았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의용대는 중국 6개 전장과 13개 성을 전전하며 항일전선에서 선전책자 5만부, 전단 51만장을 배포하고 표어 40여만개를 썼다. 조선의용대는 《의용보》신문과 《중국전장에서의 조선의용대》, 《조선의용대 총서》, 《전고(戰鼓)》, 《조선의용대 통신》 등 간행물을 출간하였다.

태항산 여러 지역에서 대일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하던 조선의용군은 산서성 요현(현 좌권현) 운두저마을에 주둔하면서 많은 항일표어들을 썼다. 현재 운두저마을 남문 루각에 남겨있는 조선어 항일표어들은 조선의용군 항전력사를 기리는 상징적 문화재로 남아있다. 표어내용은 “조선말을 자유롭게 쓰도록 요구하자!”, “왜놈의 상관놈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 “강제병에 끌려나온 동포들, 팔로군이 있는 곳마다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하늘로 향하여 총을 쏘시오!” 이러한 표어들은 70여년간의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현지 정부와 수많은 마을 주민들, 그리고 각계 벗들의 관심하에 지속적인 보수와 복원을 거쳐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으며 1992년 9월, 좌권현정부로부터 현급문물 보호단위로 지정받았다.

조선의용군은 태항산에서 중국인민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많은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조선의용군이 머물렀던 남장마을 근처에는 오지산이 있었다. 그들은 오지산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밭을 만들어 곡식과 채소를 심었다. 무정은 팔로군이 무엇을 먹으면 우리도 무엇을 먹는다고 하였다. 그들은 농사를 짓고 상점, 리발소, 의료소를 열었다. 그들이 개간한 황무지는 무려 800 무에 달했는데 태항산을 떠나면서 정부와 렬사가족에게 주었다. 그들은 떠나고 없지만 그들이 개간한 땅에서는 해해년년 곡식이 무르익고 열매가 맺어져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다. 조선의용군은 태항산을 떠나면서 “한단은 우리의 제2고향이요”라는 말을 남겼다.

수백리의 태항산자락에 자리잡은 <조선의용군렬사기념관>은 2004년에 개관식을 가졌다. 이는 조선의용군을 기념하는 유일무일한 전문기념관이다. 중국학자 상영생(尙榮生)이 수없이 발로 뛰여다니면서 정부의 승인을 받아 개관한 것이다. 기념관에는 그가 평소에 수집한 하나하나의 소중한 자료들이 사진그림으로 일목료연하게 전시되여있다. 해마다 많은 이들이 태항산을 방문하여 조선의용군의 항일유적지를 참관하고 있다.

조선의용군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중국전장에서 맹활약한 항일무장부대이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항일과 조선반도 독립을 위해 싸운 중요한 정치군사대오였고 여러 전투에서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들의 영웅적 기개와 업적은 포화가 자욱했던 나날에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피흘려 싸우고, 그리고 장렬하게 희생된 곳, 태항산이 증명해주고 있다.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