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지 설정
최신 교육 과학 문화 스포츠 건강 관광 멀티미디어 포토 중국명승 특별추천 【량회특집】
이달의 칼럼

[정음문화칼럼198] 조선족녀성구술생애사: 산재지구 조선어문 교사-라순숙(罗顺淑)(1)

최선향

2022년 11월 25일 17:22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연변대학에서 공연을 마치고(왼쪽으로부터 세번째).
라순숙 생애사 략력:

1935년, 조선 함경북도 생기령(生氣嶺)에서 태여남

1944년 봄, 가족들과 중국 화룡으로 이주함

1950년 3월, 룡정중학에 입학

1952년, 연변2고중 입학

1955년 7월, 연변대학 조문학부 입학

1959년, 연변대학 졸업후 내몽골 울란호트3중(조선족중학교) 조선어문 교사

1964년 2월, 결혼후3월에 연길현2중 교사로 전근

1964년 겨울, 아버지 사망

1965년 3월, 길림시조선족중학교 조선어문 교사로 전근

1965년, 큰아들 출산

1968년, 둘째아들 출산

1970년, 막내딸 출산

1978년ㅡ1992년, 길림성정치협상회(4, 5, 6기) 위원

1982년 7월 6일, 중국공산당에 가입

1989년, 어머니 사망

1991년 3월, 퇴직함

2006년, 둘째아들 사망

길림시조선족중학교 조선어문교연조 조장, 길림성중소학교조선어문연구회 리사 력임. 길림시 3.8붉은기수, 교육분야 우수당원. 《연변교육》, 《전국조선족교육》 등 우수론문.

퇴직후 길림시조선족부녀협회 부회장, 길림시조선족과학자협회 리사, 길림시조선족문학애호자협회 부회장 등 직 역임.

구술참여기

필자가 2018년 8월 조선족녀성로인들의 생애사를 연구하려고 길림시에 도착한 날 저녁, 송화강변으로 향한 길을 산책하다 우연하게 라순숙선생님을 만나게 되였다. 모교의 선생님을 만나 기쁘게 회포를 풀다 선생님께 생애사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겠는가고 말씀드렸더니 허락해주셔서 그 길로 선생님 댁에 가서 생애사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후에 한번 더 방문해 두번에 걸쳐 선생님의 생애사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구술자의 개성과 이미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이야기 속에 사용한 방언, 중국어 단어 등을 그대로 두고 독자들의 리해를 돕기 위해 필요한 부분에는 필자가 괄호 안에 한자나 한글 표준어를 달았다.

라선생님은 함경도말씨를 쓰셨지만 길림시에서 오래 생활하셔서 중국어단어를 많이 섞어 쓰셨다. 선생님은 대학교육을 받고 교사로 근무해온 당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셨다. 인생 전반부에는 어릴 적 조선에서 중국 연변으로의 이주와 중국내에서의 잦은 이사, 땅을 팔고서라도 자식들 공부를 시키신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인생 후반부에 가서는 작은 아들을 잃은 아픔, 그 아픔을 잊기 위해 하신 한국어과외강의와 사회활동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은혜로 큰오빠를 제외한 모든 형제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대학교육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함과 당의 부름 대로 내몽골로 가서 교사로 일하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결혼과 출산, 육아에 대해서 물었을 때는 간단하게 몇마디로 대답만 하시고 또 이야기를 열심히 학교 일과 사회활동을 하던 이야기로 되돌리곤 하셨다.

한 개인의 생애사는 사회와의 상호작용에 의한 부산물이기에 개인적 차원을 넘어 그 개인이 살아온 시대와 사회 문화적 상황을 반영한다. 라선생님의 구술생애사를 통해 그 시대 산재지구의 조선족지식인녀성, 조선어문 교사로서의 삶과 더불어 조선족 이주사, 생활사를 리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였으면 좋겠다.

조선 함경북도에서 태여나 아홉살에 중국 화룡으로 건너왔어.

1935년에 조선 함경북도 생기령(生氣嶺)에서 태어났어. 여기는 온천이야. 그저 산이지만 그래도 괜찮아. 아홉살에 중국으로 건너왔어.

어릴 때 우리 가정이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고 내 우로 오빠 셋이 있고, 내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어. 거기서 소학교 1학년을 다녔어. 1944년에 중국으로 오게 됐다고. 왜 오게 됐는가? 아버지가 거기서 석탄을 나르는 그런 데서 가솔린차를 타고 가다가 허리를 상했단 말이야. 허리를 상하고 우리 가정이 거기서 더 살아나가기가 당연히 안 됐지. 그래서 중국에 있는 큰아버지가 화룡현 번가툰이라는 데서 살기 때문에 우리가 큰아버지를 따라서 우리 일곱 식구가 두만강을 건너 여기로 오게 된 거지. 오, 녀동생도 하나 더 있었지. 그러니 여덟 식구였지. 여덟 식구가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때가 1944년이니까 일본놈들이 마지막 때고 하니까 더는 살 수 없기 때문에 화룡현 동성구 번가툰이라는 데 있는 큰아버지 집을 찾아갔어.

큰아버지네도 식구가 많았단 말이야.

큰아버지네도 식구가 그 때 많았단 말이야. 언니가 있고 오빠가 있고 남동생, 녀동생 있고. 거기에 할머니. 큰아버지(네) 일곱 식구가 그렇게 있는데 칸도 쪼꼬마한데 우리 여덟 식구까지 오니 모두 열다섯 식구가 같이 살게 됐지. 그때의 정황은 모두 다 지주의 땅을 우리가 소작을 하고 있게 되였단 말이야. 그 때 그 당시의 생활이라는 것은 더 말할 수 없이 곤란했지 뭐. 그러니까 이 정지(부엌)에 앉으면은 이쪽에 한줄 앉고, 맞은편에 한줄 앉고 열다섯이 앉아서 정말 콩에다가 시레기 먹고 이런 형편이라. 이런 형편인데. 할머니가 우리를 데리고 남산에 가서 산나물 캐러 갔지. 세투리란 게가 있었어. 세투리라는 것은 예차이(野菜, 산나물)지뭐. 산나물. 세투리에다 콩가루 버무려 그래가지고 밥 해 먹었지.

녀동생이 죽었어.

그래가지고 내가 2학년으루 화룡의 동성소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됐는데 생활이 대단히 곤란했지 뭐. 근데 그 때 녀동생이 아마도 여섯 살 쯤 됐겠다. 그 때 밥을 먹지 못하니까 거기서 동생이 굶어죽었단 말이야. 그래 동생이 죽어가지고 우리 남동생하고 나는 같이 굴뚝 옆에서 동생이 죽어 울던 그게가 지금도 생각난다. (눈물 글썽임.) 그래가지고 번가의 지주집에서 소작을 짓고 반년을 고기(거기)서 살다가 번가툰에서 아마 한 반년 쯤 산 거 같애. 그러니까 거기서 더 살 수가 없었지.

(흑룡강성 오상현) 향양산이라는 곳으로 이사갔어.

그러다 우리 이모, 우리 어머니(의) 녀동생이 저 서란(현) 건너서 산하툰이라는 데에 있었어. 그 이모가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서 거기 산하툰 지나서 향양산이라는 곳을 소개해줬지 뭐. 거기 가면 논도 많고 살기도 좋다는 거야. 그 때 우리 식구가 땅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지. 그래서 우리 여덟 식구, 이제는 일곱 식구가 서란(현)을 거쳐서 산하툰을 거쳐서 향양산이라는 거기 가서 살게 됐는데 그 때가 아마 (19)45년, 해방되기 전이야. (19)44년 겨울에 아마 이사한 거 같애. 1944년도 봄에 번가툰에 와 한 반년은 거기서 살다가 겨울은 산하툰에서 한 50리 떨어진 샹양산(向阳山)이라는 데를 가게 됐지… 그래 거기 가니까 논도 많고 살기가 괜찮았어. 그래서 거기서 농사도 짓고 풍수(풍작)도 거두고 그랬는데.

그 때는 겨울이믄 국민당하고 토비들이 와서 안 되였지 뭐.

그래서 (19)44—(19)45년 그 때에 4학년인지 3학년 쯤인가 돼서 농사를 짓고. 야, 이젠 좀 괜찮다고 했는데 그 때 국민당이 둘어왔단 말이야, 거기에. 그러니까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 전이지. 거기서 우리가 한참 가을까지도 다 하고 이제 먹기도 괜찮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19)45년도 되니까 그 때 국민당놈들하고 팔로군이 라쥐짠(拉锯战,일진일퇴의 싸움)이 붙었단 말이야. 그래서 거기서 또 살 수가 없었지. 그 때 내가 한 열한 살 됐을 거야. 겨울에 집에 있었는데 우리 오빠들은 국민당들이 오니까 그 집에 있으믄 안 되였지. 어디 숨어있었단 말이라. 근데 나는 고 때(그 때) 혼자서 뜨개를 떠가지고 양말을 떴지. 그 때는 겨울이믄 국민당하고 토비들이 와서 안 되였지 뭐. 그래서 다시 연변으로 나올 생각을 했단 말이야. 거기 가서도 2년 사나 마나 했지뭐. 썅양산에 가서. 이런 판이야.

그 때 내 열 살 넘어 양말도 뜨고 옷도 뜨고 했지.

그때 내 열살 넘어 양말도 뜨고 옷도 뜨고 했지. 내 혼자 집에 혼자 앉아있으니까 그 토비들이 와서 문을 자꾸 두드렸지뭐. 내 혼자 있는데. 그래 막 겁이 나서 문만 열어주면 막 둘치지뭐. 둘치니까 뭐 가져갈 것은 없지 뭐… 저녁에 다 모이게 됐는데 우리 둘째오빠(조선에 간 오빠말이야)가 그 국민당놈들이 올 때 확성기에다 국민당들이 온다고 소리쳤지. 그러니까 국민당들이 우리 오빠네를 찾느라고 야단났단 말이야. 고 때 막 찾으니까 어느 구석에 가만히 있으면 된다 해서 숨어있었지. 그래 우리는 오빠가 오지 않으니까 이게 무슨 큰일이 생겼다고 정말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지. 그래 국민당놈들이 다 간 다음에 후에 오빠가 다시 돌아와가지고 그 겨울에. 그건 (19)45년 (19)46년 요 사이 일이였지.

그 겨울에 우리가 연변(룡정)으로 다시 나왔지.

그 겨울에 우리가 연변으로 다시 나왔지. 그래 농사진(지은) 거 던지구 나오게 됐지. 기차를 타고 또 수레에 앉기도 하면서서 장춘을 거쳐서 라법(拉法, 길림성 교하시 라법)을 통해 신짠(新站, 길림성 교하시 신참)을 거쳐 온 식구들이 그냥 어디 와서 정착했냐면 룡정에 왔어. 다시 조선에 가려 했는데 돈두 없구 그래서 룡정에 남게 됐지. 룡정에 와가지고 고 때는 2년 동안은 우리 어머니가 바느질도 하고 콩나물장사도 했지.

그러니 나는 학교도 못 다녔지 뭐. 그 때 어머니가 쌍둥이를 뱄(임신했)단 말이야. 근데 집이라는 거는 형편 없단 말이야. 집을 세맡았는데 요 칸(약 12평방메터)보다 더 작은 집을, 온돌도 없고 가마니를 펴고 이런 데서 온 식구가 살았어. 그러니까 그 때 나는 물을 다 길어가지고 엄마 시중하고. (엄마가) 쌍둥이를 낳아서 내가 이 쌍둥이를 1년 동안 보고 밥하고 돌봐주구 했지.

번가툰으로 다시 갔어, 화룡에.

거기 살다 또다시 번가툰으로 갔어, 화룡에. (19)48년도. 고 때 가니까 우리가 다 빈농으로 됐단 말이야. 번가(지주)네 땅을 농민들에게 토지를 다 분배해주었지. 여긴 해방구였지. 중화인민공화국은 성립 안됐는데 부분적으로는 해방되였지. 지주를 청산하고 토지를 땅이 없는 농민한테다가 땅을 분배하게 되였지. 우리두 땅을 가졌어. 그러니까 우리도 (생활이) 나아졌지. 그래서 아버지랑 오빠랑은 거기서 일을 하고, 고 때 내가 다시 소학교 5학년을 다니게 되였지. 거기서 1년 반 쯤 공부한 거 같애.

오누이 쌍둥이(동생들)가 홍진 앓다 다 죽었지.

이렇게 되고 우리 오빠네도 공부를 하게 됐는데 요 1년 반 어간에 우리 어머니가 쌍둥이를 낳았잖아. 그 때는 홍진에 걸리믄 다 죽는 때였단 말이야. 쌍둥이니까 한내(하나) 죽으니까 보름 지나서 한내 또 죽었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빌어먹어도 아이들을 공부시키겠다고 했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훌륭하단 게 뭐냐믄 빌어먹어도 아이들을 공부시키겠다고, 그래서 농촌의 땅을 팔고 다시 아이들 다 데리고 룡정으로 이사왔어. 그래서 내가 소학교 6학년을 다니게 되고. 남동생도 학교 다니고. 우리 오빠네는, 셋째오빠는 룡정고중 다니고, 그 다음에 둘째오빠하고 큰오빠는 소학교 졸업하고 아무데도 못 가게 됐지.

룡정중학교에 들어갔어.

내가 소학교를 열다섯 살에 졸업맞았(했)어. 룡정에 와서 6학년 다닐 때가 열다섯 살이란 말이야. 룡정에서 소학교 졸업했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였지. 50년 1월달에 소학교 졸업맞고 1950년 3월달에 룡정중학교에 들어갔어. 룡정중학교는 이름 있는 중학교 아니나? 윤동주도 거기 다니고. 그래서 룡정중학교에 들어가서 2년 반 동안 공부하게 됐어. 그리고 졸업하게 됐지.

우리 가정이 또 우리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연길에 왔어.

초중을 졸업맞고 (19)52년도 7월달에 졸업맞았단 말이라. 그 다음 11월달에 우리 가정이 또 공부시키기 위해서 연길에 왔어. 나는 연변2고중을 갔단 말이라. 연변2고중은 이 학교가 늦게 건축되였기 때문에 11월에 개학하고 연변고중을 3년 동안 다녔어. 그 때 난 정말 해방된 사람이고. 그 때부터 문학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였고. 지금까지 춤도 추고 모든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됐어. 그래서 고중을 졸업맞고 (19)55년도 7월달에 연변대학에 들어갔단 말이야.

큰오빠 말고는 다 대학을 나왔어.

우리 큰오빠는 인민해방군에 참가해서 장춘하고 길림을 해방하는 이 전투에 참가했단 말이야. 그리구 우리 둘째오빠는 소학교를 졸업맞고 자습을 해서 연변대학 조문계(학부)에 들어갔다고. 그리구 우리 셋째오빠는 룡정고중을 졸업맞고 연변대학 화학계를, 가정은 곤란했지만 사회가 좋으니까 들어갔단 말이야. 큰오빠는 군대를 갔다 와서… 그 뒤로는 다 대학 나왔다고. 우리 둘째오빠 조문계, 셋째 오빠 화학계, 내가 연변대학 조문계, 우리 남동생이 연변대학 조문계를 나왔어. 큰오빠 말고는 다 대학을 나왔어. 내가 말하자는 게 뭔가믄 우리(가) 없는 가정에서 그 조학금으로 (공부를 하고). 이게가 가장 감격적이고 중국에 사는 우리로서는 참 잊을 수 없다는 거야. 이렇게 없는 사람들이 다 대학을 다니고, 그러니까 우리는 다 사범대학 다녔지. 연변대학. 그러니까 선생(교사) 하면서 (살았지). 돈은 없어도 학자금이 나오잖아. 국가에서 돈이 나왔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없는 가정에 누기(누구)나 대학 나왔으니가 우리는 중국에 대한 애정이 있고, 당(중국공산당)이 없으면 우리가 없다는 (생각을 해).

연변대학 조문계(조선어문학부)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지.

연변대학 조문계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지. 그 때 33명 가운데 녀자 서(셋)이고. 나는 정식으로 들어갔어. 다른 녀학생 두명은 보교생으로 들어갔어. 30명 남학생. 그 때 연변대학에 반우파투쟁이요, 투쟁을 하던 때라. 그래 내가 조선어문전업(전공)을 다니게 됐어. 초중(중학교)부터 고중(고등학교), 대학까지 다니긴 했지만 가정이 너무 곤란했지. 고중, 대학교에서 돈을 준다고 하지만 그외에는 돈이 하나도(전혀) 없어. 아버지가 일 못 하니까. 허리를 쓰지 못해서.

내 뜨개를 뜨면서 가정(살림)을 보충했어(보탰어).

그니까 소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내가 뜨개를 뜨면서 가정을 보충했지. 낮에는 학교 가 공부하고 밤에는 책을 여기(밥상)다 놓구 이래 보면서 뜨개를 뜨고 했지. 다궁(打工, 아르바이트)한 것과 같지. 그걸로 가정을 돕고, 가정생활을 돕게 되였지. 내가 대학교 들어갔을 때 저녁에 아홉시 반까지만 불(전등) 주는데 나는 복도에서 비쳐들어오는 불을 리용해 남들이 다 잠든 다음에도 보이지 않는데도 그 뜨개를 꼭 떠야 됐어. 뜨개를 떠가지고는 거기서 받는 돈(으로) 가정을 돕는다고. 그래서 소학교 부터 대학을 가게 됐지. 뜨개를, 내가 뜨개를 많이 뜬 사람이라.

당(중국공산당)이 어디로 가라 하면 어디로 간(갔)다고.

대학을 (19)59년도에 필업(졸업)했지. 지금 그 때를 말한다믄 당이 어디로 가라 하면 어디로 간다고. 그 때에 나는 아주 적극적인 사람이야. 우리 당이 요구하는 곳에 나는 꼭 간다(고 제1 지망으로 지원했어). 그 때 당시 내몽고(내몽골)에서 녀자들(녀성 대학졸업생) 수요하고 조문(조선어문)을 한 사람 수요하고, 문예를 한 사람 수요했지. 이 세가지 조건에 내가 맞아 떨어졌단 말이야. 다른 동무들들은 조건이 안 되였지.

난 내몽고(내몽골)로 가게 됐지.

조건이 되니까 난 띠이쯔웬(第一志愿, 제1지원)으로 내몽고로 가게 됐지. 그래 가지고 친척 하나도 없고, 대상(배우자)도 없고. 스물네 살에 대학 졸업맞고 내몽고로 가게 되였지. 거기서 4년 반 교사 공작(일)을 했지. 그것도 단련하는 기회였지.

내몽고 울란호트에 가서 있으면서 내가(나는) 모든 정력을 다 학생들에게 바치는 얼스쥬쑤(二十九岁, 29세)였지. 나는 결혼도 모르는 사람이였어. 당이 수요하믄 일체를 바치겠다는 이런 사람이야. 그래 가지고 거기서 스물아홉 살까지 있었어. 그런데 연변조선족자치주 교육처에서 나를 내몽골에다 보낼 때 일정한 시간 복무하고 다시 연변에 돌아온다 (했대).

경상도 사람들이 거기(내몽골) 많았어.

내몽고는 아주 젊어서 갔으니까 그저 내 모든 마음은, 가(걔-학생)들도 선생을 따르고, 나도 가들을 떠날 수 없고, 친했지. 그리고 내몽고 가니까 인심이 좋더라고. 자연조건은 겨울에 몹시 추워. 벌써 밖에 나가믄 코 여기 다 얼어들어. 그렇게 춥지. 바람도 불구. 이렇게 마른 강추위가, 강추위가 심했어. 그 때도 조선족들이 그 학교에 많이 가 있었어.

경상도 사람들이 거기에 많았어. 력사적으로 말한다믄 일본놈들이 침략하니까, 더 살 수 없으니까 평안도라든가 함경도 사람들이 중국 근처에 두만강일대에 자리를 잡았지. 이 가까운 데 심양이라든가, 매하구라든가, 통화 일대는 다 평안도 사람들이 모여들었지. 이러니까 제일 남쪽의 경상도 사람들이. 마지막에 울란호트를 거쳐서 내몽고로 갔지, 강이 있는 곳이기만 하믄 조선사람들이 있었어.

아! 우리 민족이구나. 그 때 감정이 그런 감정이더라고.

그래 내가 그 때 아, 내몽고(에) 가니까, 차에 앉아서 내몽고 갈 때 그 먼 곳에서 조선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 보니 그렇게 많이 닮았더라고. 강변에 앉아 빨래하고 있는 사람들 봐도 아, 우리 민족이구나. 그 때 감정이 그런 감정이더라고. 연변에 있을 때 그런 감정(을) 잘 못 몰랐지.

그 때 조선옷 입고 있었지 뭐. 흰 저고리 검정치마라. 연변에서도 조선옷을 입었지. 일할 땐 몸뻬라는 거 입고 있었지. 그거 입고 일했지.

거기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 지금 다 죽었지 뭐. 그 전에는 조금씩 련락 있었지. 지금 (내몽골에서 가르친) 학생들이 여기 몇이 있어. 거기서 가르쳤던 학생들이 길림시에 와 있지. 가들이 여기 세종학교 꾸려. 내가 배워줬(가르쳤)던 학생들이. 그리고 또 한내 죽었어. (허구프게 웃음)

내몽고에서 나는 추싼(초중3학년), 꼬우이(고중1학년) 가르쳤어.

룡정 연길현 2중과 길림조중 교사로 있었어.

(기한이 차서 내몽고에서 돌아와) 룡정에 있었는데 연길현 2중이야. 1년 동안 거기서 교편을 잡았다고. 1964년 2월 14일 결혼하고 3월부터 연길현2중에 와서 조선어문도 가르치고 문예대지도교사로 있었어.

남편은 길림시에서 공작(일)하게 되였지. 남편은 할빈공업대학 졸업맞고 여기(길림시)에 분배 받았단 말이야. 난 연변에 있고. 글다(그러다) 나니 난 (남편 따라) 여기(길림시) 오게 되였지. 1965년도 3월달에 여기 길림조중(길림시조선족중학교)에 오게 되였지. 그래서 1991년 3월 25일 퇴직하기까지 여기 있게 되였어. 이 어간에 여기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문화대혁명도 겪었고. 사범(당시 길림조선족중학교에 중등전문학교인 사범학교도 같이 있었음)도 가르쳤고. 추중(初中, 중학생), 꼬우중(高中, 고등학생)도 다 가르쳤고. 나는 동북 3성 (조선어문교수연구회의 회원), 길림성 조선어문 연구에, 조선어문 고우지쬬스(高级教师, 고급교사)고. 입당도 하고. 조선어문교연조 조장, 길림성중소학교조선어문연구회 리사도 하고 그랬지.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