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도식은 1997 중국수사 1호사건인 백보산사건수사협조에 가담했다. 그의 아들 최영빈도 직업생애에 한번도 사건처리에서 실수한 적이 없다.
중국인의 경우 부자관계는 흔히 그 어떤 강압적인 뜻이 담겨 있다. 두터운 정분과 침묵이 어우르고 지어 젊은이들의 마음에는 풀기 어려운 매듭이 얼기설기 엉켜져 있다. 헤겔은 부자의 공동생활은 정신적인 성장의 로정이고 인지가 부단히 교체하고 승격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최도식의 막내아들인 최영빈의 성장과정은 곤혹과 의문, 충돌 나중에는 순종으로 이어졌다.
최영빈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훙쏘러우와 가지볶음료리의 향기로운 냄새외에 기타 모든 것은 희미한 존재로 남아있다.
“나중에 내가 계산해보니 아버지는 일년 36일치고 거의 200여일은 밖에 나가 있었다.”여러 차례 특이한 공적을 세운 국보급 탄두흔적전문가, 중국수사기술전문가, 공안부특별초청 전문가인 아버지가 최영빈의 눈에는 아버지로서의 배려를 할줄 모르는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다.
1981년 흑룡강성목단강시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당시DNA기술이 나오지 않고 손톱감정이 우리 나라 형사기술령역에서 거의 공백점이나 다름없었다. 법의가 사망자의 복부에서 손톱부스러기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사건수사에 거의 도움을 주지못 못했다.
“손톱이 증거물로 되지 않을가?” 최도식은 이를 과제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흑룡강성 경찰학교 4개반급 200명 학생더러 20일에 한번씩 손톱을 깍게 하고 채취하기 시작해서부터 일년반동안 모은 소톱을 고저선배렬을 하면서 관찰했다. 최도식은 년령대에 따라 손톱의 특징과 온정성이 상이하기 때문에 사건발생후 손톱채취가 신속할수록 범죄자를 찾는데 유조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년도 안되는 사이에 “손톱의 동일성인증”성과를 발표해 우리 나라 수사기술령역의 공백점을 메웠다.
중대한 연구과제로 놓고 보면 이년이란 시간은 길지 않다. 최도식은 64년동안의 직업생애를 통해 알루미늄박필름 흔적검출, 흔적사진처리시스템, 탄두흔적자동식별시스템, 손톱동일인증, 이빨흔적동일인증과 같은 과제를 연구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실험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연구를 했다”. 최영빈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거의 만날수 없는 존재였다.
한번은 사무실에 가 아버지를 찾았는데 사무실에는 누구도 없어 불빛을 따라 지하실에 내려 갔다. 때마침 아버지가 시험실에서 법의와 함께 시체를 놓고 연구를 하고 있었다. 당시 7살밖에 안되던 최영빈은 그 정경을 보고 겁이 더럭 나서 울음을 터뜨리며 “아버지는 실인자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는 아버지의 직업생애가 최영빈에게 남긴 생생한 기억으로 된다. “나는 며칠이고 아버지를 볼수 없었고 항상 어머니곁에 있었다. 그땐 아버지를 리해할수 없었다.”
‘형사사건은 언제 발생할지 모른다.”최도식은 수시로 현장에 나타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22살 나던 해에 부대에서 흑룡강성공안청으로 전업한 최도식은 제1인민경찰간부학교에 가 흔적검출지식을 배우고 우리 나라 제1대 수사기술경찰로 되였다. 당시 그는 흑룡강성공안청의 유일한 수사기술인원이였다.
분량이 많고 책임감과 시간이 무척 수요되는 사업이엿다. 흔적검출에는 손자국, 발자국, 파괴도구흔적, 탄두흔적과 특수흔적을 망라한 5가지가 들어 있다. 일반적인 흔적은 2미리메터내외이고 탄두를 검사하려면 현미경으로 4-6시간 관찰해야 한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DNA검출등 기술수단이 형사정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선진기술보급자인 최도식은 “언제나 신기술의 발전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선진적인 기술은 흔적검출에 유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술수단은 보조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흔적검사는 경험과 반복적인 검사, 연구가 수요된다. “항상 현장에 가 참답고 세심하게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을 샅샅히 검사를 해야 한다”.
1992년 흑룡강성공안청 형사기술처 처장으로 부임한후 행정사무도 처리해야 하였다. 흔적연구사업에 영향주지 않기 위해 그는 사무실문에 “내가 지금 어느 사무실에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사무실이 바로 흔적실험실이다. “발견과 연구는 많은 시간이 수요된다. 명절과 휴식일에도 집식구들과 한자리에 모일 시간이 없었다”.
최영빈은 아버지를 리해할수 없었다. “왜 낮과 밤이 없이 그처럼 고달프게 일하는가요?”
최영빈의 물음에 최도식은 어린 시절 지주의 칼에 맞은 상터를 내보였다.
조선족인 최도식은 1934년 길림성매하구에서 출생했다. 당시 일제의 철제밑에서 허덕이던 그는6살때 고아로 되였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소학교와 초중을 마친 그는 조국을 보위할 일념으로 참군했다. 부대에서 전업한후 단위의 지지하에 흔적기술을 배우게 되였다.
최도식: “사업에 참가한후 보답하려는 일념으로 시간과 정력을 전부 열애하는 사업과 나라에 바쳤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이 직업을 선택했다”
1997년 중국수사1호사건으로 불리우던 백보산사건이 발생할때 최도식의 년령은 63세였다. 당시 북경과 신강에 남긴 탄피가 유일하게 가치있는 단서였다. 당시 감정결과에 따르면 북경에 남긴 것은 “81식 자동보총”탄피로 신강에 남긴 것은 56식반자동보총”탄피로 두곳의 총격사건을 련쇄사건으로 판정할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 결과에 가슴을 치며 장담하지 못했다.
최도빈은 신강에 초청되였다. 16매의 탄두를 가지고 64번 대조를 했으며 40여매의 탄피를 가지고 사흘낮 이틀밤 현미경으로 2밀리메터도 안되는 탄두흔적을 관찰했다. 마침내 그는 모두 81식자동보총탄두로 인정하고 신강와 북경의 사건을 련쇄사건으로 처리할 것을 건의했다.
그 결과에 따라 수사일군들은 1997중국수사제1호사건으로 불리운 백보산사건을 사출했다. 최도식이 채용한 감별수법은 탄두흔적감정의 교과서식 사례로 되였다.
그의 학생들은 그를 흔적검출대사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왈가불가할때 그는 서슴없이 파단을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판정이 지어 한 사람의 생명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백보산사건이 발생한 이듬해에 초영빈은 부대에서 전업하여 수사기술경찰로 되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아주 잘된 일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었지만 최영빈에게 있어서 이는 피동적 결정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니면 이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2000년에 모지방에서 두차례 렵총강탈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렵총에 대한 연구는 지역화되여 탄두와 탄피대조는 상당히 어려웠다. 이는 최영빈이 그의 직업생애에서 처음으로 봉착한 풀어나가기 무척 어려운 난제였다.
그는 아버지를 찾았다. “나와 아버지는 거의 반년을 들여 머리를 맞대고 이 사건을 연구했다. 나는 사건의 진척상황을 아버지께 회보하고 아버지의 조언을 들었다.” 최도식의 지도하에 최영빈과 동료들은 당시 국내 렵총생산공장을 모두 찾아보고 모든 종류의 총을 일일이 검사분류하고 전국을 상대로 종합적인 수치연구보고를 제출해 공안부에서 항목립안하도록 했다.
부자간의 정분이 점차 돈독해 지고 있는 과정에 아버지가 “인정사정”보지 않는 통에 최영빈은 한때 불만이 생겼다. 2002년 최영빈은 공개초빙을 거쳐 할빈시공안국 수사기술지대 부중대장으로 부임되였다.
그런데 최도식은 최영빈의 령도를 찾아가 “우리에게는 지도자가 적임이 아니니 흔적검출에 주요한 정력을 붓도록 배치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 최영빈은 아버지의 행위에 전혀 리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화가 상투밑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젊은 사람들이 본직사업을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집에서는 합리하건 말건 모든 요구는 제출하는 법이 없다. 사업전근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몇차례 제출했다가 퇴박맞은 후 아예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중에 우리 형제들은 습관이 되여 이런 일은 언급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리해는 한순간에 온것이 아니다.
전국우수인민경찰이며 할빈시로력모업이며 할빈시10대 장인인 최영빈은 선후로 개인 3등공 2차, 2등공 1차를 받았다. 수사기술사업에 몸을 담근후 20년래 그는 여러 차례 영예를 지녔다. 그는 아버지에게 얼마나 많은 재간을 배웠다. 그래서 “특별한 의난문제를 제한외에 대다수 흔적검출은 스스로 하고 있다”
최영빈은 지금까지 7000여건의 흔적물증을 검사했는데 한번도 차질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거의 완전무결하다고 할수 있는 아버지의 경력으로 자기를 대조하면서 아버지가 여러 해동안 축적해온 영예에 얼룩이 갈가 항상 주의를 돌리고 있다.
할빈시공안국수사기술지대 정위 묘건절은 여러 해동안 최도식과 같이 일해왔다. “최도식은 고집에 세고 보는 대로 말하는 사람으로서 절때 군소리를 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최영빈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군인의 기질을 가진 영식이는 무슨 일도 박력있게 밀고 나가고 있다.”
흔적검사는 쪼크리고 앉아서 하는 일이다. 현장에 남은 흔적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 검사일군들은 쪼크리고 앉거나 엎드리고 눕고 웅크리는 자세로 검사를 하게 된다. 올해 85세인 최도식은 지금도 수사과정에 뒤로 물러선적이 없고 최영빈도 이를 게을리 한적이 없다.
그러나 연구와 관찰면에서 아버지와 차이점이 적지않다. 사업과정에 격차가 크지 않고 내려다 보면 똑똑치 않아 포기한 흔적은 줄곧 최도식의 마음에 걸려 있다. 격차를 확대하고 포기하는 흔적에서 문제를 발견하기 위해 1994년에 60세의 최도식은 자학을 통해 컴퓨터와 PC기술을 장악하고 또 이 기술을 흔적사진처리에 도입했다. 이 기술은 1996년에 공안부에서 립안한 흔적사진처리시스템에 들어갔다.
최도식은 또 알루미늄박필름으로 탄두라선흔적을 찾아내는 기술을 발명했다. 최영빈과 큰아들 최성빈이 제도와 설계를 하고 부자 3인이 탄도흔적평면장치를 고안해냈다. 동일한 직업에서 최씨부자는 공동의 화제를 찾게 되였다.
현장에 가 반복적으로 검사를 하고 실험실에 10여일동안 불면불휴의 날을 보내며 깊은 밤중이라도 전화가 걸려오면 자리를 차고 일어나야 한다. 아버지의 사업을 리해하지 못하던 최영빈의 몸에서 아버지의 일과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충돌과 순종으로 인생을 지나오면서 이들 부자는 점차 하나로 변하고 있다.
명탐정의 배후에는 온가정의 심혈이 들어있다.
2016년에 최도식의 안해 심옥이는 알츠하이머증으로 진단이 났다. 안해에 대한 말이 나오자 최도식은 종이수건을 입에 물고 흐느꼈다.
1999년 최도식은 정년퇴직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제시간에 사무실에 출근하였다. 그 기간 흑룡성내에서 발생한 형사사건외에 정주특대총격살인사건, 백은사건을 비롯한 전국중대사건의 배후에는 모두 최도식의 중요한 기여가 들어 있다.
최영빈: “정년퇴직전에 아버지는 실험실과 현장에 거의 붙어있다 싶히 했다. 그러다 보니 가정 특히 어머니를 돌볼 겨를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아버지가 가정도 돌보지 않는다고 나무람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거의 어머니의 신변을 지키지 못했다. 로년에 이런 몹쓸 병에 걸렸는데 아버지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한생을 두고 당과 국가의 은혜를 갚기 위해 모든 것을 이바지해 온 최도식은 전혀 대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 성과에는 온가정의 묵묵한 희생이 한몫하고 있다.
최도식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컵을 들고 물을 마시며 솟구치는 정서를 간신히 갈앉혔다. 방안은 몇십초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로친에게 너무 등한했어”.
이는 지난 수십년동안 가사를 외면한 가책에서 우러러 나오는 말이리라, 지난해부터 최도식은 안해와 같이 양로아파트에 입주했다. 그는 입주시 현미경, 알루미눔박필름 등을 함께 들고 갔다. “ 출근하지 않지만 경상적으로 출장하고 있다.”
지금 그는 주로 사건현장에서 보낸 견본을 통해 흔적검사를 하고 있다. 한편 직접 참가한 사건현장자료를 정리해 무상으로 국가에 바칠 생각을 하고 있다. “생로병사는 자연법칙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참고될 자료들을 남기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김옥이는 점차 망각속으로 추락되고 있다. 그러나 가끔 젊은 시절의 일을 떠올리고 있다. 어느날 김옥이는 갑자기 전에 즐겨 부르던 “번지없는 주막”을 조선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자금 그는 자기의 세아들도 기억하지 못하고 지어 자기 이름도 잊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성공안청에 가 최도식을 찾아 탄두검출을 한다”는 말만은 기억하고 있다.
최영빈은 “어머니는 자기의 생명을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사업과 하나로 이어놓았다. 이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리해하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최영빈에게 있어서 최도식은 기둥같은 존재이다. 이들 부자는 “정신성장이 로정”과 “인지의 부단한 교체와 격상과정”을 완수하고 점차 동심일체로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