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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절강 녕파 여요시 횡감두촌:

촌민들의 생활은 날따라 활기가 넘쳐난다(부탁 명기하고 꿈 쫒아 달리다-총서기의 답신을 받은 뒤)

본사기자 공상무

2019년 08월 14일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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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일을 잘 처리하여 향촌진흥을 실현하자면 기층당조직은 반드시 견강해야 하고 당원대오는 반드시 훌륭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초심을 잊지 않고 사명을 명기하며 홍색유전자를 잘 전승하고 당조직의 전투보루 역할과 당원선봉모범 역할을 잘 발휘하여 촌민들과 함께 한층 더 분발하고 열심히 실제적으로 일하면서 자체의 실제와 결부시키고 자체의 우세를 발휘하여 부유하고 문명하며 살기좋은 아름다운 향촌을 힘써 건설함으로써 촌민들의 생활로 하여금 날따라 활기가 넘치게 하기를 희망합니다.

—습근평

“횡감횡감, 가로로 보나 세로 보나 끝이 보이지 않는구나.” 그것은 현세기 초의 절강 녕파 여요시 량농진 횡감두촌이였는데 집들이 낡아빠지고 산길이 울퉁불퉁했으며 한해 동안 벼를 이모작했는데 사람들이 가난을 피해 외지에로 달아났으며 촌집체가 45만의 빚을 지고 있었다.

비가 멈추고 날씨가 개일 때 기자는 절강동부 사명산아래의 로혁명근거지의 촌마을에 들어섰는데 마치 수묵화 속에 들어선듯이 졸졸 흐르는 시내물이 마을을 누비면서 흐르고 있었다.

흰담벽에 검푸른 기와를 얹은 민가와 무성한 과수나무, 즐비한 점포, 남북으로 오가는 관광객들… 횡감두촌의 지난해 인당 가처분소득은 3만원을 돌파했고 촌급수입은 528만원에 달했다.

2003년 음력설 전야에 당시 절강성당위 서기직을 맡았던 습근평동지가 사명산혁명로근거지를 고찰했다. 그는 모처럼 량농진과 횡감두촌을 찾아 조사연구하고 좌담회를 소집하고 로당원과 곤난군중들을 위문하면서 ‘전국로혁명근거지의 전면적으로 초요사회로 달리는 본보기진’을 건설할 것을 간곡한 기대했다.

2018년 2월, 횡감두촌 전체 당원들은 습근평 총서기에게 편지를 보내여 촌의 발전변화를 회보했다. “15년전에 당신들의 촌에 갔을 때의 정경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며 나는 줄곧 촌민들을 그리면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습근평 총서기의 회답편지에는 깊은 정이 가득했다.

전후의 두통의 편지는 15년을 뛰여넘었다. 이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횡감두촌 촌민들의 마음은 너무나도 격동되였다.

“한번씩 읽을 때마다 나의 마음은 뜨거워진다. ”

“총서기의 회답편지를 한번 읽을 때마다 나의 마음을 뜨거워진다. ” 73세에 난 로당원 황지요는 습근평 총서기의 회답편지 복사본을 자세히 들여다보군 한다.

올해 음력설 명절 집에 붙이는 주련은 황지요가 “총서기의 부탁을 명기하고 새농촌건설을 발전시키자”는 문구로 자체로 만들고 자체로 썼다. “올해는 더욱 좋을것이다”라는 횡서를 바라보면서 그의 생각은 16년전으로 돌아갔다. “생각 밖에도 이렇게 여러해가 지난 뒤에도 총서기께서 아직도 우리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때에는 촌이 아주 가난하여 부문별 도움과 부축에 의거했다. 습근평동지가 촌을 찾아 절동항일근거지 옛터를 참관할 때 나는 한창 그곳에서 관리원으로 있었으며 당시에는 옛터가 아직도 ‘군체’를 이루지 못하고 다만 한개 주요 전시청을 갖고 있는 기념관이였다.”

횡감두촌의 홍색자원은 특별히 좋으며 일찍 절동항일근거지 중심소재지였다. 황지요는 2000년부터 2004년까지 해마다 평균 관광객이 연인수로 2만명 가량밖에 안되였다는 당년의 사업필기를 찾아냈다.

“습근평동지의 고찰시 요구를 시달하기 위해 2003년 음력설후 첫 출근날에 촌 당지부위원회와 촌민자치위원회는 회의 연구를 거쳐 습근평동지에게 편지를 보내여 사업타산을 회보했다.” 횡감두촌당위 서기 장지찬은 생각 밖에도 사흘뒤에 그이가 우리에게 회답편지를 보내였다고 말했다.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임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