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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감동을 안겨준 의지력의 인간

안도현 이도백하진 원 진장 요건림의 사적 

2014년 01월 14일 09:41【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2013년 11월 16일은 비통한 날이였다. 피로가 쌓여 병이 된 요건림은 치료에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이날 오후 4시에 40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요건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안도현에 신속히 퍼져 도시와 농촌의 곳곳마다에서 비통해하고 애석해하고 눈물을 흘렸다. 추도회에서 요건림의 가족들은 비통하여 목이 메도록 통곡했고 그의 동사자들은 흐느낌을 걷잡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으며 그가 복무한적이 있는 기업의 종업원들과 촌민들은 오열을 터뜨렸다. 그 시각, 그들 모두는 마음속의 말을 하고있었다. 요진장, 당신은 너무 일찍 떠났습니다…

빈곤한 가정의 의지가 강한 학생

1973년 4월 5일, 요건림은 안도현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는 현농기회사에서 근무하고 어머니는 일터가 없어 품팔이로 돈벌어 가사에 보태였다. 그는 형님, 누나가 있는데 다섯식솔의 생활은 주요하게 아버지의 변변찮은 월급으로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형편은 요건림의 의지를 련마했고 일찍부터 철이 든 그는 주동적으로 부모의 일을 방조했으며 소학교부터 중학교까지 그의 성적은 시종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형님이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교에 입학하자 요건림은 열심히 공부하여 지식으로 운명을 개변시키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허나 가정의 빈곤으로 그는 고중입학을 포기하고 중등전문학교에 지망하여 가정부담을 줄이는 길을 선택할수밖에 없었다. 1989년, 그는 연변2중의 합격선을 30여점이나 초과한 성적으로 연변공업학교 공업및민용건축전업에 합격됐다. 중등전문학교에 입학한후, 그는 학습의 기회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전업지식을 열심히 배웠으며 줄곧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학교의 제1회 백과지식경연에서 1등을 따냈고 1등장학금을 여러차례 받았으며 “우수학생”등 영예도 받았다.

기층에서 착실하게 단련하다

1993년 7월, 요건림은 연변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현주택회사에 배치받았다. 출근한 첫날부터 그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으며 건축공사장에 뿌리를 박았다. 1997년 6월, 현건축공정회사로 전근한 요건림은 허심하게 선배들과 가르침을 청했고 짧은 시간내에 건축업종의 사업요령을 장악했을뿐만아니라 건축에너지소모감소 면에서 적극 탐색, 시도했기에 동료들은 모두 그를 “어린 전문가”라고 칭찬했다.

1997년 11월, 요건림은 현건축공정품질감독소에 조동되여 감독원직무를 담임했다. 공정품질의 중요성을 잘알고있는 그는 경상적으로 검측기계를 떠메고 현장에서 감독검사를 진행했다. 어느 한번 그가 그의 친척이 시공하는 공지를 순찰할때 건물벽체가 표준에 부합되지않는것을 발견하고 당장에서 공사를 정지시키고 정돈조치를 내렸다. 그의 친척이 몇번이고 사정을 했지만 결국엔 무너뜨리고 재건하는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러한 인정사정을 보지않는 검사는 공정품질을 효과적으로 제고했고 건축기업과 백성의 호평을 받았으며 그가 책임지고 감독한 공정은 여러차례 성, 주의 우수공정칭호를 수여받았다.

빠듯한 사업일정에서도 그는 시간을 짜내여 자기개발을 꾸준히 했다. 1995년부터 2000년사이, 그는 북경공업대학의 전문대학, 본과대학 련속학습과정을 완수했다. 그사이 그는 또 선후로 예산원, 기술원, 입찰업무, 공정건설감독관리, 건축공정인원재교육 등 여러 강습반에 참가했다. 2002년, 그는 순조롭게 시험을 통과하여 전 현의 건설계통에서 처음으로 되는 국가등록감독관리공정사로 됐다.

2001년 7월, 다년간의 배양과 고찰을 통해 그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2003년 5월, 그는 조직에서 배양하는 청년후비간부로서 영경향에 파견되여 향장조리직무를 담임했다. 향당위, 정부는 당시 비교적 어려운 특산품세금을 징수하는 사업을 그한테 넘겨주고 인삼특산품세금징수소조 조장을 담임하도록 했다. 맡겨준 임무를 원만히 완수하기 위해 그는 낮에 현장에서 인삼의 보유면적을 측량하고 밤이면 당직을 서면서 인삼운수차량을 검사했으며 세금을 빠짐없이 징수했다. 파견기간 그는 향으로부터 중소학교 교수청사건설의 감독관리임무를 받았다. 기간 그는 학교숙사에서 숙식하고 공지를 지켰으며 시공의 각종 환절을 엄격히 감독하고 총체적인 구조가 완공되기까지 소홀히하지 않았다. 반년남짓한 파견경험은 그의 기층사업능력을 지고했고 그의 성장에 견실한 토대를 마련했다.

맡은 사업에 최선을 다하다

2004년 7월, 다년간의 학습과 실천을 바탕으로 요건림은 전 현지도간부공개선발시험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현건설국 부국장 직무에 합격됐다. 임직후 그는 도시건설, 원림, 환경위생, 종합집법사업을 관리했고 그후, 도시구역의 큰길과 골목길에는 “돌아다니기”좋아하는 사람이 한명 늘었다. 그는 이러한 가장 실무적인 방식으로 도시건설의 현황을 료해하고 발견한 정황을 하나하나 적었으며 대책을 생각하고 제때에 해결했다.

해마다 “환경위생절”이면 그는 아침일찍부터 환경위생일군에게 전화하고 메세지를 전달하면서 축하의 인사를 전했고 거리에 나서서 일터에서 사업하고있는 환경위생일군들을 위문했으며 련환모임을 조직하여 환경위생일군들이 즐거운 명절을 보내도록했다. 매년 그믐날 밤이면 그는 환경위생일군들을 도와 폭죽을 터뜨린후의 쓰레기를 청소하고 그들과 함께 끝가지 일했으며 이튿날에는 또 일찍이 환경위생일군들한테 명절의 인사를 전했다.

빈곤가정 출신인 그는 군중과 깊은 감정이 있다. 신분이 떨어지니 이러한 사소한 일들은 관계말라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때마다 그는 “내가 무슨 신분이 있습니까. 군중이 만족하면 저는 본분을 지킨것입니다”고 대답한다.

그와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은 그를 사업에 대해 특별한 열정이 있고 평소 자주 연장근무하며 주말, 명절에도 휴식하는일이 적다고 평가한다. 도시구역골목건설, 쓰레기오수처리 등 민생공정건설을 추진할때 그는 더우기 밤낮이 없이 현장에서 지휘했다.

사업 외의 시간에 그는 조사연구에 중시를 돌리고 도시건설에 적극 헌책했으며 그가 작성한 론문은 성, 주 건축학회로부터 2등상과 3등상으로 평가받았고 그와 동료의 신근한 노력하에 안도현의 도시면모는 큰 호전을 가져왔으며 2008년 안도현은 “성급원림도시”칭호를 수여받았다.

곤난이 있는 곳에는 그가 있었다

2010년 7월 28일 안도현은 백년일우 특대홍수의 피해를 입었다. 그날 오후 3시, 폭우로 인해 도시구역 부분적 길은 비에 잠겼다. 그는 제1시간에 사업일군들을 거느리고 위험구간에서 구조작업을 펼쳤다. 그는 무릎을 넘어오는 흙탕물에 뛰여들어 하수구덮개를 찾았으며 맨손으로 하수구에 몰려든 쓰레기들을 제거했다. 장백산문화박람성 친수대의 다리가 막혀 물이 흘러넘치자 그는 또 솔선해 가슴까지 잠기는 물에 뛰여들어 퇴적물을 제거했다.

그날 12시, 현과 국의 포치에 따라 가는 20명 민병소조로 구성된 응급대를 거느리고 수해향진으로 달려갔다. 이튿날 새벽 4시, 그들은 겹겹곤난을 극복하고 영경향에 도착한후 인차 촌민들을 도와 물자를 나르고 하천의 위험구간에 모래주머니를 운송했다. 저녁 9시에 이르러 2곳에 위험구간이 존재한다는 명령을 접한 그는 온 밤 순시하면서 굳건히 지켰다. 30일, 현의 배치에 따라 그는 또 재해가 엄중한 량강진 서강촌으로 달려갔다.

그날부터 재해복구가 결속될때까지 요건림은 서강촌에서 100일동안 분전했다. 일이 바쁠때면 제때에 밥도 챙겨먹지 못했고 위가 나빠 입쌀밥이 소화가 되지 않으면 뜨거운 물로 밥을 담그었다가 대충 먹었다. 위가 아프면 약을 먹고 버텼다.

재해복구시기 그는 공사현장에서 먹고 자면서 재해복구지휘부 기타 령도와 동료, 로동자들과 함께 366세대 수해가옥의 재건임무를 예정된 시간내에 완수해 수해군중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보낼수 있도록 했다. 3개월간의 간고한 노력으로 10근 넘게 살이 빠진 그는 당시 수해복구에서 가장 먼저 재해지구에 갔다가 가장 마지막에 재해지구에서 돌아온 사람이였다.

사업의 맨 앞자리에는 그가 있었다

2011년 5월 24일, 그는 조직의 명령을 받고 이도백하진 당위부서기 겸 진장으로 파견됐다.

이도백하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촌민들을 찾아다니면서 진의 실정을 료해했다. 이도백하진 당위서기 송혁신은 요건림을 “전 촌 1100평방킬로메터 정황을 그는 손금보듯 합니다” 라고 평가한다.

이도백하의 독특한 광천수자원을 둘러싸고 그는 투자유치를 적극 전개했다. 상인들이 진에 고찰하러 오면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배동하면서 일일이 소개했다. “정부의 우대정책부터 당지 인문지리까지 요건림은 명확히 알고 있어 상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야크그룹 투자부 총감인 양택명은 당시를 회억했다.

2013년 4월, 북경의 한 상인이 선지광천수대상을 고찰하러 왔는데 요건림이 배동을 해야 했다. 당시 그의 건강상황이 좋지 않자 동료들은 그를 휴식해라고 권했다. 하지만 요건림은 대상현장고찰부터 좌담회소개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배동했다. 상인이 돌아간후에야 동료들이 그를 차에 싣고 병원으로 향했는데 차에서 내리자 그는 온몸에 힘이 풀려 겨우 운전수 등에 업혀 들어갔다. 송혁신이 수차례나 휴식을 취하고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을것을 권했지만 그는 “괜찮습니다. 요즘 바빠서 시간이 없습니다. 나중에 가겠습니다”고 말했다.

2013년 9월 초, 야크그룹과 안도현은 광천수대상을 체결했다. 9월말, 기업투자부는 진에 와서 대상을 고찰하려 했다. 당시 장춘에 위병검사를 가려던 그는 소식을 접한후 그날 일정을 취소하고 진에 돌아왔고 그후 10여일동안 상인들의 고찰을 배동했다.

그의 뛰여난 업무능력, 진심어린 태도는 대상의 합작과 건설에 든든한 토대를 마련했다. 한패의 중대대상이 착공건설되면서 진 경제의 비약발전에 강유력한 지지를 제공했다. 이도백하진은 선후로 2011년 전 현 “대상건설봉사 1등상” , 2012년 전 현 “돌출기여상”을 받아안았다.

마음속에는 늘 백성들이 있었다

현인대대표인 그는 백성들의 복지에 늘 마음을 두고 있었다. 특색산업으로 농민들의 소득을 높이기 위해 그는 블루베리기지건설대상을 적극 쟁취하고 230만원을 투자해 스틸온실하우스 2.25만평방메터 건설하고 200여호 농민을 부축했다. 도시와 농촌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그는 해당부문 책임자들과 함께 노력해 3068만원에 달하는 대상자금을 적극 쟁취했다. 동시에 조률해 모든 촌에 쓰레기차, 운송차를 배치해 전 촌의 환경위생이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도록 했다. 2011년 이도백하진은 “새농촌건설사업선진집체”로 평의되였고 2012년 이도백하진 장승촌은 “국가급생태촌”으로 평의되였다.

그는 군중들의 곤난을 진심으로 대했다. 촌민 곡계화가 정신질병으로 앓고 있어 생활이 어렵게 되자 그는 조률을 통해 곡계화에게 새집을 지어주고 7000여명 비용을 감면해주었다. 촌민 량초가 치부항목을 찾지 못해 요건림을 찾아오자 그는 량초의 실제에 따라 “농가락”향촌관광대상을 찾아주고 그에게 가옥소유증, 영업허가증 등 수속을 밟아주었는데 이 대상은 인차 실시됐다.

2013년 “8.15”홍수는 그를 재차 검증했다. 당시 병이 위급했던 그는 권고도 뒤로한채 피해가 엄중한 홍풍촌에 뛰여가 수해인원들을 전이시키고 비를 맞으면서 순시했으며 산새태가 엄중한 지역에서 당직을 섰다. 이 기간 그는 밥먹고 물 마실 시간도 없었으며 피곤하면 차에서 쪽잠을 자면서 버텼다. 며칠간의 분전으로 요건림은 쓰러졌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서 링겔주사를 맞은후 의사의 저지도 물리치고 재해복구 1선에 뛰여들었다. 진 재력이 긴장한 정황하에서 그는 기다리지 않고 제1시간에 재해복구를 조직해 군중들의 생산생활을 보장했다.

믿을수 있는 사람

생활에서 요건림은 가족을 지극히 사랑했다. 안해를 위해 그는 가정일을 맡아 했고 결혼기념일과 안해 생일에는 다양한 이벤트로 안해를 기쁘게 했다. 그는 또 시간만 있으면 딸과 함께 책을 보면서 마음을 나누고 딸에게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주었다. 딸의 성적은 반급과 학교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했다. 로인들은 짬짬의 시간을 리용해 찾아가고 말동무를 해주었으며 형제들을 존경해주었다. 하지만 사업이 바쁜 그가 특히 이도백화로 전근된후 사업에만 몰두하다보니 주말에도 집에 갈수 없었고 안해, 딸의 생일과 결혼기념일도 챙기지 못했다. 가장 바쁠때에는 3개월반동안이나 집에 가지 못했다. 그의 딸이 일찍 어머니랑 함께 장백산으로 가족여행 가자고 졸랐지만 그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그는 돌아가기 전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동학과 친구들 마음속의 요건림은 남을 돕기 좋아하는 열혈인간이였다. 그 누구의 집에 일이 생기면 그는 가장 먼저 달려가 도움을 주었다.

당위에서 확정한 일이라면 그는 무조건 완수했다. 동료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첫째, 인품이 좋다. 요건림은 그 누구와도 화를 낸적 없고 아무리 바빠도 화기애애하게 말하며 무슨 일이나 남부터 생각한다. 둘째, 학습에 열중한다. 퇴근후 그는 늘 사무실에서 책을 보는데 밤 10시를 넘기기가 일쑤다. 지금도 그의 사무실에는 “토지법”, “계약세법”등 서적들이 놓여져있다. 셋째, 사업이 너무 바쁘다. 아침 출근하면 손님이 찾아온다. 그는 찾아온 매 손님마다 따뜻하게 대하면서 문제를 해결해준다. 넷째, 소박하다. 이도백화에 온 이래 그는 새옷을 사입은적 없다.

리별의 아픔

팽이처럼 밤낮없이 돌아친 그는 끝내 무너졌다. 2013년 10월 19일, 위통증이 심해져 일을 할수 없게 되자 그는 현중의원에 가서 위경검사를 했으며 위분문 부위에 궤양을 동반한 출혈이 있는것을 발견했다. 의사는 상급병원에서 진일보 검사를 받을것을 건의했다.

단위에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있어 그는 진에 돌아가 시급히 처리한후 10월 2>>2일, 길림대학 제3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했다. 병리결과는 “위저분화선암”말기였다. 의사는 보통사람들은 이런 정도까지 버틸수 없으며 반년전에 치료했더라면 병세를 통제할수 있었다면서 절제수술을 건의했다. 15일동안 그는 선후로 두차례 수술을 했다. 11월 7일, 두번째 수술을 마친후 송혁신이 병원을 찾았을때 요건림은 송혁신의 손을 붙잡고 “송서기를 도와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신체가 안돼서 어찔 방법이 없는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입원치료를 받는 기간 그는 동료들의 사업에 영향을 끼칠까봐 그의 병세를 숨기고 병문안을 오지 못하게 했다. 혼미기간에 그는 입버릇처럼 “일이 어떻게 되였습니까? 마무리되였습니까” 라고 말해 보는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수술후 출혈이 잦아져 11월 16일, 그는 세번째 수술을 했다. 오후 2시 40분, 수술의사는 심장박동과 호흡이 멈췄다고 전했다.

요건림이 돌아갔다는 소식이 안도현에 전해졌다. 가족의 기둥이였고 사업의 기둥이였던 요건림이 돌아갔다. 각급 지도자들과 동료, 동학, 친구들과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비통의 눈물을 흘렸다.

레브•똘스토이는 생명의 가치를 이렇게 평가한다. “인생의 가치는 시간으로 가늠하는것이 아니라 깊이로 가늠한다.”요건림은 비록 무정한 병마로 인해 생명을 잃고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열애하는 땅을 떠났지만 그의 업적은 안도현의 간부 군중들에게 널리 칭송되고있으며 광범한 안도현의 아들딸들이 발전의 길에서 기운차게 나아가도록 고무격려하고있다…(고운 기자).

래원: 연변일보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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