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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백인]걸출한 홍군장령 양림

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 백인》(3)

2013년 06월 04일 15:46【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중국 서북지역 황막한 황토고원을 남북으로 꿰지르며 거칠게 흐르는 황하의 동쪽기슭에 "홍군동정기념관"(하북성 석루현)이 있다. 이 기념관 전시청에는 1936년 2월 중국홍군의 동정항일에서 제15군단 75사 참모장 양림이 선두영을 이끌고 비발치는 탄우속을 뚫고 동정의 길목을 열어놓은 영웅사적에 대한 전문소개가 있다. 거기에선 양림의 략력을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삐스티 소전. 삐스티(1898-1936)는 ‘양녕’, ‘양림’이라고도 하며 조선인이다. 1919년 중국에 망명, 1921년 운남강무당 제16기 포병과에 입학, 졸업뒤 황포군관학교 구대장.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1월 엽정 독립퇀 제3영 영장. 1927년 남창봉기와 광주봉기에 참가, 9.18사변후 중공만주성 군위서기. 1932년 중앙혁명근거지에서 사업, 장정시 군위간부퇀 참모장. 섬북쏘베트구역 도착시 홍군 15군단 75사 참모장. 1936년 2월 21일 동정도하전투에서 장렬히 희생, 그때 그는 38세.."

조선인으로 기록되여있는 양림이 중국의 거치른 섬북 황하기슭에 영영 잠들기까지 그는 중국의 력대무대에서 무수한 혈전을 치르며 걸출한 군사지휘가로 활약을 펼쳐왔다.

군사에 뜻을 둔 망명자

양림(원명 김훈)은 1919년 세계를 들썽한 평양 "3.1"독립운동장의 학생기수로 수많은 평양학생들을 애국운동에로 불러일으켰다. 왜놈들의 피비린 탄압을 피해 그해 늦가을 중국으로 망명해온 그는 독립운동기지인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를 배웠다. 1920년 3월, 그는 왕청 서대파일대에서 반일무장부대 북로군정서 사관련성소 군사교관으로 된다. 그해 10월 21일부터 6일간 화룡일대에서 일제놈들의 토벌에 맞서 싸운 청산리대첩에서 그는 한 개 중대를 거느리고 용감히 싸워 나젊은 지휘관의 군사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1921년초, 그는 천신만고를 겪으며 운남강무당에 입학하여 제16기생으로 포병과를 배운다.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입학이 불가능하여 화교의 신분으로 "양주평"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벽돌 10장씩 등에 지고 10여리길을 달리면서 단련하였는데 전교 사생들속에서 “포부가 큰 고려학생”으로 알려졌다. 어느 하루, 일본인교관이 창격술을 강의하고 오만스럽게 “5분간이라도 겨뤄볼 사람 나와보라”고 가슴을 쳤다. 잠간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양림이 교관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사생간의 뜻하지 않은 날창찌르기가 10분 넘도록 계속되였다. 바빠맞은 일본교관이 나중에 손을 들었고 손에 땀을 쥐고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양림은 일제교관의 기염을 꺾어놓고 운남강무학교의 전설로 되였다.

1924년초 양림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황포륙군군관학교로 갔다. 당시 학교정치부 주임인 주은래동지의 보고와 연설을 들으면서 그는 조선의 해방과 중국혁명의 성공은 불가분리의 관계임을 터득하고 피압박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심한다. 이 시기 그는 공산주의신념을 가지고 1925년가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시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훈련처 교관을 맡았고 주은래동지의 친솔하에 반동군벌을 무찌르는 동정에 참가하며 엽정독립퇀 제3영 영장, 영당소조 당소조장으로 3개 중대 500여명 장병들을 거느렸다. 1926년 장개석의”중산함사건”이후로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탄압을 피해 조직실력을 보존하기 위한 당의 배치에 따라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가 군사를 배운다.

동만(연변), 남만 유격대 창시자

1930년봄, 3년간의 쏘련류학을 마친 그는 동북 할빈에 도착한다. 양림은 만주성군위서기로 부임되였다. 그뒤 중공동만특위와 특위군사위원회를 내오면서 양림은 중공동만특위군위서기 중책을 짊어지게 되며 1930년 10월 연변땅을 밟게 된다. 그로부터 중공동만특별위원회가 정식으로 구성되며 연화현위, 왕청현위, 훈춘현위가 성립되였고 또 그 산하에 군사부가 설치되여 유격대와 적위대에 대한 직접적인 지도가 강화된다.

동만의 유격대사업이 활기를 띠면서 중공동만특위군사위원회에서는 양림의 노력과 지도밑에 동만유격대의 사업경험을 전면적으로 총화하고 동만실정에 부합되는”동만유격대사업요강”을 제정하였다. 이 요강은 양림이 친필로 쓴 중요한 군사문헌으로서 7000여자에 달하는데 유격대의 임무와 의의 등 도합 9개 문제를 일목료연하게 제기하엿다. “동만유격대사업요강”은 연변당조직에서 유격대의 사업을 정확하게 론술한 첫 군사문헌으로 된다.

9.18사변이후 양림은 중공만주성위로 소환되며 1932년 4월초 남만중심지대인 반석에 이르러 리홍광과 함께”하마하자폭동” 등 농민폭동을 련속 조직지도하여 남만항일투쟁을 고조시켰고 유격대발전을 추진하였다.당시 유격대는 “반석로농의용군”으로 발전장대되며 후에 동북항일련군 제1군의 전신으로 된다.

그뒤 계속하여 동만 4개 현의 항일유격투쟁에 대한 지도를 다그쳐 1932년 봄과 여름사이 동만특위와 4개 현 군사부를 통해 분산된 각 지방유격대를 통일된 현유격대로 조직발전시켰다. 이어 항일유격거지를 세우고 유격대활동을 이끌어냄으로써 동북항일련군 제2군의 기초력량을 다졌다. 양림은 명실공히 동북항일무장투쟁의 토대를 마련하고 발전시킨 창시자, 조직자의 한사람으로 손색이 없다.

중앙홍군의 걸출한 군사지휘가

1932년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동북을 떠나 강서 중앙쏘베트구역으로 간 양림은 중앙쏘베트지역에서 선후로 강서군구 지역군분구 사령원, 홍군 제1방면군 1군단 참모장 등 직을 력임하고 로동 및 전쟁 위원회 참모장을 맡으면서 군대와 인민군중을 동원하여 국민당군의 제4차포위토벌을 분쇄하기 위해 불철주야 분전하였다. 그는 짧은 기간내에 10개 보충퇀을 조직하고 직접 훈련을 책임졌으며 한패 또 한패의 로농전사들을 집중훈련시켜 주력홍군에 수송하였다.

1933년 10월 중앙홍군대학이 설립되자 그는 홍군대학 총교관을 밑았고 로전위원회의 참모장으로 되였으며 모택동, 주은래 등 중앙지도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였다. 1934년 1월 강서 서금에서 열린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차전국대표대회에 그는 조선민족대표로 참가하여 주석단의 일원으로 선출될뿐더러 중앙집행위원회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 시기 그는 “삐스티”라는 이름을 썼는데 그의 로씨야식 이름으로서 그 뜻은 “정의를 위하여 필사적으로 싸운다”로 해석되고있다.

장개석의 제5차”포위토벌”이 발동하고 중국로농홍군의 2만 5천리 장정이 시작되는 그때 장정을 앞두고 양림은 중앙군위 간부퇀 참모장으로 임명된다. 간부퇀의 주요과업은 중앙기관과 중앙수장들의 경위를 담당하는것으로 이 과업은 영광스럽고도 간거하였다.

1935년 4월 중앙군위에서는 장정도중 금사강을 강행도강하기로 결정짓고 교평나루터를 탈취하여 홍군부대의 도하를 엄호할 과업을 간부퇀에 맡기였다.

교평도 량안의 나루터를 통제하고 금사강을 건너는것이 부대전체가 수십만 적들의 포위, 추격, 제지, 차단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이고 전략적 이동에서 결정적인 의의를 가지는 중대한 승리라는 점을 양림은 잘 알고있었다. 1935년 5월 3일 저녁무렵, 양림은 선봉대를 이끌고 주야로 140키로메터 길을 달려 금사강에 이르렀다. 적정과 나루터의 형편을 탐지하고 나루배를 리용하여 밤도와 물살이 센 강을 건너 교평나루를 기습탈취하여 적 한 개 련과 보안대놈들을 전부 생포하였다. 여섯주야의 강행도하로 수만명에 달하는 홍군대오가 9일에 전부 강을 건넜다.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 중앙지도자들은 양림이 거느린 간부퇀 용사들이 열어놓은 진군길 따라 나루배에 앉아 무사히 금사강을 건넜다.

장정길에 오른 홍군 제1방면군 주력부대가 장정을 마치고 섬북에 도착한후 양림한테는 또 새로운 과업이 제기되였다. 1936년 2월 중국로농홍군은 모택동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황하를 건너 동정항일을 하기로 결정지었다. 중앙군위에서는 오랜 혁명투쟁의 시련을 겪은 양림을 황하도하작전의 중임을 맡은 홍군 제15군단 제75사의 참모장으로 파견하였다.

이 시기 산서군벌 염석산은 공산당과 홍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1000여리 황하동안에 매 1리마다 견고한 또치까를 구축하고 드센 화력을 배비하였으며 밤낮없이 순라하면서”황하는 금성철벽”이라고 떠들었다. 황하도하를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 모택동과 중앙군위 지도자들이 직접 75사를 찾아 포치하고 지도하며 분망히 보냈다. 양림은 선봉영을 지휘하여 도하작전용배를 비밀나루터에 대기시키고 농민차림으로 황하령마루에 올라 대안의 지형과 화력망, 공격지점, 등륙후의 전진로도로 등을 자세히 살피면서 작전계획을 주밀히 짰다.

2월 20일 밤 10시, 양림은 선두영의 장병들을 이끌고 비밀리에 강행도하를 시작하였다. 배가 대안에 이르기도 전에 적들에게 발각되였다. 비발치는듯한 탄우속을 뚫고 장병들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가면서 드디여 대안을 쟁탈하고 또치까를 박산내면서 승승장구로 적진을 향해 진격하였다. 이때 뜻하지 않게 양림은 적탄에 복부를 맞고 쓰러졌다.

이튿날 그가 하가요마을에서 치료를 받고있을 때 황하도하사령원인 주사제가 그를 찾아 위문하였다. 양림은 주사제를 만나자 첫마디로”모주석께서 강을 건느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모주석께서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 말에 그는 가까스로 기쁨을 피워올렸고 주사제더러 빨리 전방으로 떠나라고 재촉하였다. 양림은 그때 황하기슭의 어느 한 언덕에 묻힌채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길이 없게 되였다.

조선민족의 자랑찬 아들이며 중국공산당의 훌륭한 고위군사간부였던 양림, 그가 목숨으로 수행한 황하도하작전, 이 천험돌파는 렬세한 장비를 가진 홍군부대가 절대적 장비우세에 또치까까지 가진 적들을 타승한 중국혁명사의 빛나는 한페이지이다. 당년의 황하도하사령원 주사제는 해방후 60년대에 황하도하작전과 양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홍군의 동정항일은 중국공산당과 모주석이 령도하는 중국인들이 창조한 력사적기적이다.국제주의, 공산주의 전사 삐스티동지는 이런 기적을 창조한 중요한 일원중의 한사람이다. 그의 정신은 영원히 중조인민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홍군 15군단 편성표, 75사 참모장으로 삐스티(양림).
래원: 길림신문 (편집: 김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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