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9)
2016년 04월 29일 13:59【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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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외국어도 무기의 일종
한번은 한빙동지가 자습시간에 우리의 교실로 들어왔다. 강진세는 그때 제자리에 앉아서 로문으로 된 무슨 책을 보고있었다. 한빙이
눈결에 그것을 보고 신기한듯이 걸음을 멈추며
“그게 로문서적 아니야?”
하고 물었다.
강진세는 다소 긴장해나서
“예, 그렇습니다.”
하고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어, 빠자예브의《괴멸》이군. 그래 능히 리해할만한가?”
한빙은 다소 의혹을 가지는듯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물었다.
“예.”
하고 외마디대답을 하는 강진세의 얼굴은 금시에 붉어졌다.
한빙은 그 책을 집어들고 싱글벙글 웃으며
“좋아, 그럼 내 한번 시험을 쳐보지.”
하고 손이 닿는대로 책장을 펼쳐놓고 그중의 한 단락을 뽑아 소리내게 읽게 하고 그다음에 다시 번역을 시켜보았다.
북조선에 주둔하는 쏘련군사령관 쓰찌꼬브대장이 연회석상에서 여러 손님을 돌아보며 한빙동지의 로씨야말을 들으면 마치 타국에서 고향친구를 만난것 같은 친절감을 느낀다고 절찬한것은 이때로부터 10년후의 일이다.
강진세와 한책상에 앉아있는 고기봉도 흥취를 느껴서 팔꿈치로 강진세의 옆구리를 직신직신 건드리며
“작은아씨, 어서 읽어! 내가 감독할게.”
하고 빙긋거렸다.
한데 어찌 알았으리, 강진세가 그 한 단락을 조금도 막힘이 없이 줄줄 내리읽고나서 또 멋지게 번역까지 해낼줄을. 한빙은 너무도 기특해서 강진세의 등을 두덕두덕 두드리며
“어 됐어, 훌륭해. 완전히 합격이야. 정말 생각밖인걸!”
하고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다시 묻기를
“우리 이 중대안에 로어를 아는게 또 누가 있어?”
“주제민… 지도원.”
하고 대답한 다음 강진세는 다시 조심스럽게 가는 목소리로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중대지도원 주제민은 이로부터 10여년후에《미츄린문집》을 번역출판하였다. 비록 그가 생물학자는 아니였지만. 당시 그의 신분은 외교관이였다.
한데 세상일이란 때로 묘하게 안배되여서 혹시 운명의 신이 뒤에서 조종을 하지나 않나 의심이 드는 경우가 없지 않다. 군관학교에서 한책상에 앉았던 두 친구—고기봉과 강진세가 10여년후에 하나는 제1비서가 되고 또 하나는 제2비서가 되여 한시당위위원회에서 또다시 이마를 맞대고 사업하게 될줄을 누가 미리 알았으랴.
아득한 옛일을 돌이켜보건대 우리 일대의 조선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여나는 그날부터 일본식민지의 노예였다. 중국작가 서군의 말대로 “조국이 없는 아이들”이였다. 우리는 부득불 어려서부터 일본말을 “국어”삼아 배워야 하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제 민족의 말을 하면 책벌을 받아야 하였었다. 그러므로 우리 중대의 학생들은 거의다 일어에 능숙하였다. 하여 후일 항일의 전쟁마당에서 우리는 그 노예의 락인인 일어를 침략군에 대항하는 무기로 삼아 일본제국주의강도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었다. 우리의 대적군삐라 즉 종이탄도 적아량군의 주고받는 철탄이 비발치는 싸움터에서 무시 못할 공훈을 세웠던것이다.
일제 통치시기에는 영어도 몹시 세워서 중학교부터는 필수과목으로 되여있어 한주일 엿새 동안에 일곱시간이 영어였다. 하여 조선에서도 그 종주국인 일본과 마찬가지로 영어가 널리 보급된 이른바 제1외국어였다. 따라서 지식인치고 영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에 로어를 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러니 우리중대 전체 학생들중에서 로어를 장악한것이 강진세 하나뿐이라 해도 그리 놀랄 일은 못된다.
자, 군관학교의 생활정형을 서술하느라고 보귀한 편폭을 너무 많이 잘라먹지 말고 인제 그만 필봉을 딴데로 돌려보기로 하겠다. 그러니 일찌감치 졸업식을 거행하고 교문을 나서서 저 들끓는 전투의 격류속으로 뛰여들어보자.
(다음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