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기 정의를 산처럼 중히 여긴다(총서기의 인민감정)
2018년 02월 23일 13:42【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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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북고원은 설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집집마다 붉은색 춘련을 붙이고 황금빛 설떡을 튀여냈으며 요란한 폭죽소리가 산과 구릉지대에 울려퍼졌다.
습근평 총서기는 “당년에 나는 사람이 떠났으나 마음을 이곳에 남겼다”고 말한적이 있다. 오늘날 량가하를 떠난지 40여년이 되였지만 그는 의연히 마을사람들을 만나자 딸린애, 깜둥이, 쇠자물쇠 등 그들의 아명을 부를수있었다… 총서기와 래왕했던 사소한 일들을 추억하면서 마을사람들은 “근평은 여태껏 우리를 잊은적이 없으며 그는 정의를 중히여기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정의를 중히 여긴다’는것은 기자가 총서기의 발자취를 따라 취재하는 과정에 그가 당년에 공부했던 교정, 그가 당년에 하향했던 마을, 그가 당년에 사업했던 현성, 그가 고찰과 조사연구했던 곳, 지어는 국외에서도 모두 자주 듣는 단어였다. 이 ‘황토지의 아들’은 마음속에 량가하의 어른과 마을 사람들을 담고있었을 뿐만 아니라 960여만 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광활한 대지의 인민들을 언제나 념려하고있다.
[7년동안의 지식청년 세월에 습근평은 량가하 촌민 석춘양과 두터운 우정을 맺었다. 1975년 10월, 습근평이 량가하를 떠난뒤 석춘양은 촌당지부 서기 직무를 이어받았으며2016년에는 또 량가하 당총지부 서기 직을 담임했다. 그는 총서기가 남긴 아주 값진 재부가운데의 하나가 바로 ‘정의’라는 재부라고 말했다.
“마을사람들은 그와 아주 사이가 좋으며 늘 그를 외우고있다.” 석춘양은 소파에 단정이 앉아있었는데 그 뒤의 벽에는 총서기가 2015년 2월에 량가하에 왔을때 찍은 몇장의 사진들이 걸려졌고 아래목은 뜨끈뜨끈했으며 물이 난로 우에서 끓고 고양이가 발목에 기대고있었다. 창밖에서는 한창 천백년래 상전벽해의 커다란 변화를 겪고있었다.
1969년 1월, 하향지식청년 습근평이 섬북혁명로근거지에 내려왔으며 이 작은 산골마을에 내려왔다. 그때의 섬북은 집집마다 흙 토굴에서 살면서 농사일만 하면서 살았다. “습근평이 량가하촌 지부서기직을 맡아서 짧디짧은 1년 남짓한 사이에 가난하던 마을에 생기를 가져왔다.” 그는 촌민들을 이끌고 섬서의 첫 메탄가스탱크를 만들고 관개용 우물을 팠으며 철물사, 재봉사, 대리판매점, 방앗간을 꾸렸다…
석춘양은 총서기가 촌에 남긴 시설들은 오늘까지도 사용중이라면서 그는 언제나 군중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들을 해줬고 또 40여년간의 정의를 남겼으며 온 마을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