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14)
2016년 05월 09일 13:51【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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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태항산의 등잔불
당시 화북조선청년련합회(조선독립동맹의 전신)의 선전부는 네 사람으로 구성되였었는데 그 이름들을 차례로 적으면 아래와 같다.—류신, 장지광, 박문 그리고 나. 우리 선전부에는 남다른 특권 하나가 있었는바 그것은 즉 밤에 석유등잔을 무제한 맘대로 켤수 있는것이였다. 다른 단위나 기구들에서는 일률로 취침전 반시간 동안 평지기름불을 켜야만 하였다. 그것이 당시 팔로군 전군에서 시행되는 내무규정이였다. 팔로군의 생활이 얼마나 간고하였는가는 여기서도 가히 그 일단을 엿볼수 있다.
우리의 그 석유등잔은 류신이가 도맡아서 건사하였다. 날마다 기름을 붓고 또 등피를 닦고 하였다. 한데 한번은 그가 출장을 갔다가 칠팔일만에 돌아와 본즉 그 언제나 깨끗이 거두어서 새말갛던 등잔의 등피가 새까맣게 그을어서 똑 마치 무슨 굴뚝과도 같았다. 그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쓴웃음을 웃으며 그 등피를 뽑아들고 일변 닦으며 일변 우리를 보고 묻는것이였다.
“내가 영영 돌아오잖았더라면 어떻걸번들 했지?”
우리 세 사람은 웃으며 이구동성으로 단언하였다.
“어떻거긴 뭘 어떡해, 안 켜고 살지!”
이때부터 우리의 류신동지(그의 본이름은 전용섭. 간도 룡정태생으로 원래 양주소집 아들이였다.)는 일언반구의 군소리도 없이 종신적 등잔관리대신의 영예로운 칭호를 달게 받았다.
류신은 우리 부의 부장 겸 당소조의 조장이였다. 당회의가 있을 때는 한빙동지와 강진세가 와 참석하여 소조성원이 모두 여섯으로 되였다.
한번은 우리 주인집에 불상사가 생겼다. 그 집에서 놓아먹이는 면양들중의 한마리가 산에 올라가 풀을 뜯어먹다가 실족을 하여 그만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져 죽은것이다.(꼭은 모르겠지만 실련이나 염세에 기인한 자살은 아닌상싶었다.) 하여 집주인은 우리하고(찍어서 말하면 류신이하고) 교섭하기를 고기값을 절반만 치러주면 제가 맡아 깨끗이 손질해서 먹도록 해주마는것이였다. 류신이는 흐름따라 배 몰기로 선심을 써서 어서 그러라고 선선히 동의를 하였다. 당시 우리의 급료는 중대장급대우였으므로 매달 3원 50전 기남은행권(하북성 남부은행권)이였는데 그 돈으로는 적사탕 여덟냥을 겨우 살수 있었다.(당비와 구락부비를 바치고나면 3원도 못 남는다.) 하여 우리 몇몇은 호주머니를 톡톡 털어보아서 그 양고기값을 치러주었다. 그런 연후에 회식할 손님 둘을 청하였는데 그는 곧 최창동지와 석정동지였다.
늦은 저녁때 집주인이 소래기로 여러 소래기 담아 내온, 낭에서 투신자살을 한 양의 고기를 본즉 온데 푸릇푸릇 멍이 들어서 여간만 가관스럽지가 않았다. 해도 우리는 출출한김에 산해진미 맞잡이로 포식들 하였다.
상머리에서 최창동지는 흥이 나서 기차로 씨비리횡단을 하던 이왕지사를 이야기하였다. 당시 그는 모스크바로 가려고 조쏘국경을 몰래 넘어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차에 올랐었다. 세계에서 가장 긴 그 철도는 두주일 동안을 계속 달려서야 겨우 종착역인 쏘련 수도에 도달한다는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