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덕동지는 인민의 리익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그의 죽음은 태산보다도 무겁다.” 6월 23일 오후, 연안 조원혁명기념관에서 해설원 백호운이 30여명의 길림관광객을 이끌고 모택동동지가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은 연설을 발표한 옛터를 참관하면서 이 빛나는 저작을 되새겼다.
1933년 중국로농홍군 제4방면군이 사천성 의롱현 륙합장(六合场) 즉 지금의 사덕향인 장사덕의 고향을 해방했다. 현지 청년들은 앞다투어 지원하여 참군했으며 장사덕은 바로 이 열혈청년들속의 한 사람이였다.
“장사덕은 혁명에 참가한 뒤 전투속에서 수차 전공을 세웠으며 전사들은 그를 ‘꼬마호랑이’라고 친절히 불렀다.” 연안시당위 리론강사단 단장 안진화는 장사덕이 그 짧은 일생에서 시종 자신을 엄격히 요구했으며 언제나 당과 인민의 리익을 최고위치에 올려놓았다고 말했다.
부대를 따라 장정에 참가하여 섬북에 도착한 뒤 장사덕은 늘 짬을 타 주둔지 린근에 있는 백성들의 집을 찾아 그들을 도와 곡식을 거둬들이고 길을 수리하고 물을 길어다주군 했다. 한번은 승냥 한마리가 어린아이를 물어가는 일이 발생했는데 그가 총을 들고 문밖까지 쫒아갔으나 총격에 아이가 다칠가봐 달려들어 승냥이 꼬리를 잡아챈 뒤 흉악한 승냥이를 때려죽이고 아이를 구해냈다. 또 한번은 외출근무하던 도중에 그는 한 할머니가 땔나무를 등에 지고 힘겹게 걷는것을 보고 즉각 다가가 할머니를 도와 땔나무를 집까지 지여다주었다. 그뒤 그는 할머니를 자기의 친어머니처럼 여기면서 자주 찾아보았을뿐만아니라 할머니를 도와 곡식을 심고 집안일도 도와주군 했다.
1944년초, 장사덕은 당중앙에서 제기한 대생산운동의 호소에 적극 호응하여 주동적으로 안색현 석협욕에 가서 생산농장을 꾸리고 부대장직을 맡았다. 그해 9월 5일, 장사덕은 전우와 함께 토굴 몇개를 새로 더 파서 목탄을 더 많이 굽기로 했다. 점심때쯤에 토질이 푸석푸석한데다가 비물이 스며들면서 거의 완성되고있던 토굴이 갑자기 무너졌다. 위급한 시각에 장사덕은 필사적으로 옆의 전우를 토굴밖으로 밀어내고 자신은 토굴속에 파묻혀 불행하게도 희생되였다.
래원: 인민넷 | (편집: 임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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