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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1]불요불굴의 투사 리계순

항일전쟁승리 70돐 기념 기획련재- 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 

2015년 05월 13일 14:38【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리계순렬사 화상(자료사진)

[편자의 말]: 올해는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승리 70돐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당년에 가렬처절했던 동북 항일유격전쟁은 중국인민의 민족해방사업의 일부분으로 되였다. 피어린 나날 11개 군으로 무어진 동북항일련군에는 피끓는 조선족 장병들이 많았으며 그들중에는 조선족녀전사들이 적지 않았다.

녀전사들은 나라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가녀린 녀성의 몸으로 총대를 잡고 나서서 청춘도 사랑도 생명도 선뜻이 바치고 자식도 가족도 희생하면서 자랑스럽고 눈물겨운 력사를 썼다. 하지만 지금까지 동북항일련군에서 싸운 조선족녀전사들의 사적을 하나로 묶어 체계적으로 보도하지 못했다. 오늘부터 본 사이트는 리함선생이 답사하고 연구정리한 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전사들의 이야기를 20기로 나누어 게재한다.

1

1935년 봄에 리계순은 처창즈근거지에서 딸 정자를 낳았다. 계순이와 김일환의 사랑의 결실이다. 중공화룡현위 제5임 서기였던 두번째 남편 김일환이 이른바 “민생단”혐의로 1934년 음력 11월, 처창즈근거지에서 살해되니 갓난애 정자는 유복녀로 고고성을 터치였다. 설상가상으로 근거지의 식량사정이 절정에 달하여 몸이 너무도 허약한 계순이는 젖이 나올리가 만무하다. 헌 두루마기에 싸인 갓난애는 배가 고파서 울기만 한다. 계순이는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았다.

알고보면 리계순은 1914년생이고 화룡현 덕신사 금곡촌, 오늘의 룡정시 금곡촌 사람이다. 1935년 음력 10월초, 안도현 처창즈(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화안촌과 그 일대)근거지가 정식으로 해산된 후 근거지의 로약자와 부녀들은 무조건 하산하여야 했다. 그러나 리계순과 시어머니 오옥경, 조카 김선 셋은 죽어도 산아래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뻐기였다. 김일네 집안(부처간)과 남창수네 집안(삼형제), 강일수네 집안, 리계순네 집안(네식구) 도합 16명 “민생단” 련루자 가족들은 먼저 처창즈 서남차골안에 초막을 지어놓고 남아서 계속 싸울것을 결의하였다.

후에 이들 16명 대가족은 동남차골짜기 막바지에 귀틀집 하나를 지어놓고 단합살림을 꾸리면서 근거지 여기저기 산속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련계를 가지고 반일자위대를 조직하였다. 계순이와 조카 김선이는 이 자위대의 녀대원으로 되였다. 새해 1936년을 맞으며 리계순은 조직의 비준으로 남창수와 결혼하고 부부간이 되였다. 꼭 남편 김일환이 희생되여 2년만에 있은 세번째 결혼이였다.

1936년 음력설을 앞두고 이들 처창즈반일자위대는 산속에서 한개 분대를 거느리고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3사 8퇀을 찾고있는 김명주를 만났다. 3사라면 화룡퇀으로 개편된 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2퇀을 가리킨다. 반일자위대는 김명주한테서 3사 8퇀이 안도현 경내에서 활동하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도움으로 8퇀과 련계를 가지였다. 8퇀 퇀장 전영림은 리계순네 모두를 퇀의 특수반으로 받아들이는데 동의하였다. 이는 겨울이 발버둥질치는 1936년 이른봄의 일이다. 총을 잡고 원쑤놈들과 싸우려는 리계순의 소망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리계순 소속 3사 8퇀은 그 뒤 항일련군 제2군 제6사 제8퇀으로 부름을 달리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산속에서 적의 “토벌”대와 맞띄웠다. 으슥한 자리에 음페했는데 첫돌이 갓 지난 정자가 배고프다고 울어댔다. 전체의 목표가 로출될 위험한 시각에 계순이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저고리솜을 뜯어 아기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기는 낯색이 파랗게 질려갔다. 다행히 시어머니가 내 아들의 후대는 이것뿐이라며 입의 솜을 빼고 아이를 안은채 산속으로 천방지축 깊이 들어간데서 아이는 구사일생으로 사경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더는 부대에 시끄러움을 끼칠수 없었다. 계순의 시어머니 오옥경은 어린 정자를 업고 하산을 결심했다. 찰나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아기 정자는 어머니한테 가겠다고 기를 쓰면서 울어댔다. 시어머니도 울고 계순이도 흐느꼈다. 시어머니는 강잉히 정자를 둘쳐업고 급급히 그 자리를 떴다.

2

리계순 소속 제8퇀은 1936년 4월과 5월에 김일성장군이 지휘하는 소속 3사와 더불어 남만의 무송현 만강, 동강, 소탕하, 시난차 등지에서 연거퍼 전투를 벌리여 승전고를 울리였다. 6월에는 또 무송 서강에 둥지를 튼 위만군병영을 습격하여 쾌거를 올리였다. 녀전사 리계순은 3사의 녀전사들과 함께 무송 경내 일련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였다.

1936년 7월에 항일련군 제2군 3사 8퇀은 금천현 하리회의결정에 의해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 제8퇀으로 재편성되였다. 이해 8월 17일, 리계순은 6사부대의 일원으로 무송현성 진공전투에 참가하여 재차 녀전사의 위용을 보여주었다.

이해 1936년 여름, 가을 내내 리계순 소속부대는 안도현과 무송현 일대에서 활동하다가11월에 6사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무송경내를 떠나 장백현 희샤즈거우밀영으로 움직이였다. 그해 따라 강산같은 눈이 일찌기도 내려 부대의 행군은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해산후 제때에 몸을 춰세우지 못한 계순이는 이를 악물고 대오를 따라섰다. 그러다가도 로숙할 때면 작식대원들의 선두에서 돌아치면서 전사들의 식사를 마련하였다.

밀림속 행군은 계속되였다. 몸이 허약한 리계순은 발에 심한 동상을 입어 더는 대오를 따를수가 없었다. 8퇀 퇀부에서는 리계순과 몇몇 부상자, 로약자들을 무송현의 후방밀영에 남아 치료하도록 조치를 대고는 계속 길을 다그쳤다. 조카 김선이는 계속 부대를 따라갔다. 한동안의 치료를 거쳐 리계순의 동상은 차도가 보이였다. 1937년에 잡아든후 계순이와 그의 동지들은 무송현의 후방밀영을 떠나 끝내 장백의 희샤즈거우밀영에 이르러 오매에도 그리던 부대의 넓은 품속에 안기였다. 이 밀영에서 리계순은 6사 사장 김일성장군을 다시 뵈였고 사령부에 남아 일을 보게 되였다.

허나 리계순은 심한 동상을 입어서 계속 치료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리계순은 눈물을 흘리면서 백두의 최후방밀영으로 불리우는 장백현 횡산밀영으로 갔다. 횡산밀영에는 간부료양소와 무기수리소, 재봉대실, 후방병원 등이 있었는데 계순이는 이 밀영에서 서로 헤여진지 일년도 훨씬 넘는 처창즈근거지 시절 금곡촌 출신 박영순과 재봉대원 박수환이를 만났고 2군 정위 위증민을 두번째로 상봉하였다. 1937년 음력설을 계기로 횡산밀영에서 6사 사장 김일성장군을 다시 뵈였다.

1937년 3월초 2군 6사의 주력부대는 장백현을 떠나 무송일대에로의 원정길에 올랐다. 리계순 등은 희샤즈거우밀영에서 홍두산밀영으로 가는 태고연한 밀림속의 천연바위굴로 옮겨갔다. 이것이 바로 후세에 이름난 백두의 홍두산림시병원―바위굴 병원이다.

바위굴병원에는 40대의 중국인 손의사와 화룡현 약수동 출신 2사 군수부장 박상활, “4련로톨”, 리계순, 연길현 출신 4련장 리두수, 중국인 청년 왕동무 등이 있었다. 그중 손의사와 군수부장, “4련로톨”은 발에 심한 동상을 입었다. 손의사도 동상을 입기는 하였으나 좀 경한 편이여서 의사의 직책을 리행할수 있었다. 손에 부상을 입은 왕동무는 식량과 관련되는 일과 련락임무를 맡았다. 마지막에 온 리두수는 갓 지난 홍두산전투에서 왼쪽다리에 부상을 입은터였다.

3

어느덧 봄이 오고 여름이 왔다. 1937년 6월 4일 조선 보천보전투가 있은 후 6사에서는 바위굴병원에 편지와 선물을 가득 보내왔다. 리계순은 눈물이 글썽하여 빨리 동상치료를 끝내고 부대로 돌아가 원쑤놈들과 싸우리라고 맘먹었다.

리계순은 바위굴병원에서도 환자이자 간호원, 작식대원이였다. 이해 여름 박상활이 통졸임통으로 만든 톱으로 이레동안에 썩어드는 열발가락을 잘라낼 때 그녀는 박상활을 꼭 붙들고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꼈다. 다 자른후에는 또 정성을 다해 돌봐드리였다.

그해 8월, 6사에서는 한개 소대를 파견하여 바위굴병원에서 몇리 떨어진 곳에 귀틀집 한채를 지어주고 한초남과 5명 전사들을 각기 후방병원 책임자와 식량공작원으로 파견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고락을 나누던 손의사는 병이 나아 부대로 돌아갔지만 동상인데다가 년초에 임신까지 한 리계순은 계속 병원에 남아있어야 했다.

1937년 겨울이 찾아왔다. 12월초의 어느날 아침 왕동무와 리두수는 관솔을 얻으러 귀틀집을 나섰다. 이럴 때 끄나불을 통하여 밀영지를 알아낸 적들은 감쪽같이 포위를 치고 조여들고있었다. 얼핏 보아도 적들은 200명쯤은 될것 같았다.

사태는 위급했다. 한초남은 사부로 련락을 떠났는데 집안엔 리계순과 박상활, “4련로톨”이 누워있었다. 귀틀집 북쪽 200메터쯤 되는 곳에 있던 리두수는 왕동무를 사부에 보내 급보를 전하도록 하고 귀틀집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바로 이때 귀틀집문이 벌컥 열리더니 박상활이 고함을 지르며 벼랑쪽으로 내달았다. 그는 적을 유인하려고 벼랑가까지 갔다가 권총을 빼들고 한발밖에 없는 탄알로 원쑤 한놈을 쏘아넘기고 벼랑아래로 몸을 날리였다. 리계순과 “4련로톨”은 박상활과 다른 방향으로 내닫다가 허리치는 눈속에서 불행히 체포되였다. 리두수는 진대나무에 걸려 쓰러졌다가 곰이 들어갔던 진대속에 몸을 감춘데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리계순 등은 장백현성에 설치된 현경찰서 감옥으로 끌려갔다. 적들은 진짜 공산당을 붙잡았다고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했다. 그러나 심문과 고문으로도 리계순의 입을 열지 못하였다. 리계순은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았다. 12월 23일에 리계순이 감옥에서 몸을 풀고 남자애를 낳은데서 적들은 잠시 손을 늦출수 밖에 없었다. 계순이는 감옥에서 아기를 기를수 없어 감옥에서 근무하는 원 항일련군전사 백룡길(白龙吉)에게 갓난애를 부탁하였다. 백룡길은 갓난애를 맘씨 좋은 감옥밖의 범희정(范喜亭)에게 맡기였다.

리계순은 장백현경찰서 서장에게 사람들앞에서 연설할 기회를 달라고 하였다. 현경찰서 서장은 한차례 “반성연설”을 획책하면서 1937년도 막 가던 12월 26일에 리계순을 현성의 한 소학교마당에 끌어냈다. 마침 그날이 장날이라 적들은 조선 혜산쪽에서 넘어오는 장사군들도 모조리 지금의 실험소학교자리에 모이게 하였다.

4

그때는 적들이 항일련군이 몽땅 소멸되였다고 떠들던 때라 진상을 모르는 군중가운데 적지 않게 믿고있었다. 리계순은 군중들과의 만남을 한차례 항일선전의 기회로 간주하고 떳떳이 군중앞에 나섰다. 그는 핍박에 못이겨 끌려온 군중들을 둘러보면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비록 죽지만 조선인민혁명군(압록강 량안의 조선사람들에게 그렇게 알려졌음)으로 불리우며 장백땅을 휩쓸던 항일련군 6사는 살아있으며 사장동지도 살아있다. 일제놈들은 꼭 패망하고 우리 민족이 해방될 날은 멀지 않아 올것이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일본침략자들을 이땅에서 몰아내자…

군중들은 뒤숭숭하였다. 질겁한 적들은 군중들을 막아나서며 바삐 연단에 올라가 리계순의 입을 막느라 야단이였다. 짜고든 “반성연설”이 항일선동으로 번져졌으니 적들은 놀라도 되게 놀랐다. 이자들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실제로 체험하고 맥을 버리였다. 리계순은 도로 감옥에 갇히였다.

적들은 리계순한테서 아무것도 기대할수 없었다. 그래서 사형장에 내세우기로 결정했는데 “공산당녀자가 ‘귀순’했다”고 굉장하게 떠들어놓은 뒤여서 공개적으로 죽일수가 없었다. 하여 적들은 1938년 1월의 어느날 리계순을 장백현 리수구 대호에 비밀리에 끌고가서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장백현 리수구 대호(梨树沟大湖)에는 3호의 조선족세대가 살고있었다. 리수구대호는 장백현성 북쪽으로 15리 떨어진 고장에 있다. 적들이 물러간 후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렬사의 유체를 고이 묻어주었다.

1972년 5월 1일 장백현에서는 렬사의 무덤을 현성의 탑산남쪽가에 이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해당 자료에 의하면 리계순의 시어머니는 산에서 내려간후 혁명이란 이 두글자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굳세게 살아가면서 손녀애를 살리느라 고생이 많았다. 계순의 친정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수가 없어 외손녀의 생사여부로 골몰하다가 조선전쟁이 끝난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는 외손녀를 만났고 딸 계순이 남긴 달비를 외손녀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1989년 5월, 중국 길림성대표단 그리고 장백조선족자치현 관련 지도일군들과 관련 부문, 조선 량강도 대표단의 참석하에 장백현에서 리계순렬사 유골이장식이 장중히 열리였다. 이장식에는 당시 무송현 우정국 당위서기이고 리계순의 혈육인 남중일(南中日)도 참가하였다. 남중일은 리계순이 1937년 12월 23일 감옥에서 낳은 아기로서 리계순과 남창수의 소생이였다.

리계순렬사의 유골이 조선 혜산의 통상부두에 도착했을 때 조선로동당 당력사연구소 부소장으로 근무하는 김정임(金贞任 즉 리계순과 김일환 렬사의 딸 김정자) 등이 맞아주고 평양으로 호송하였다. 렬사의 유골은 조선 평양의 주작봉마루 “대성산혁명렬사릉”(大城山革命烈士陵)에 고이 모셔졌다.

조선 평양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모셔진 리계순 동상(자료사진)
래원: 길림신문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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