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홍광(1910—1935):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참모장 겸 제1사 사장
리홍광, 1910년 출생, 조선족, 원적은 조선 경기도 룡암군이다. 리홍광이 9살되던 해에 일본제국주의의 노역과 억압에 참을수 없어 그의 부모는 온 가족을 데리고 중국 길림일대로 이주해왔으며 1926년에 길림성 이통현 류사취자툰에 정착하였다. 억압과 노역 속에서 굴욕적이고 정처없는 생활을 해왔던 리홍광은 점차 일본침략에 반항하고 번신과 해방을 추구하려는 신념을 수립하게 되였다.
1930년 3월, 리홍광은 이통현 삼도구에서 로농적위대를 세우고 대장을 담임하였다. 적위대는 친일분자를 견결히 타격하고 악패지주를 엄벌하여 군중들의 옹호와 환영을 받았다. 1930년 8월, 중공반석현위가 성립된후 리홍광은 적극적으로 진보활동에 참가하여 당지 당조직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하여 곧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단원으로 되였으며 9월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 8월, 중공만주성위는 군중항일투쟁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반석중심현위를 건립하고 중심현위가 령도하는 쌍(양)이(통)특별지부를 내왔는데 리홍광이 특별지부 조직위원을 담임하였다. 《9.18》사변후, 리홍광 등은 전문적으로 한간을 징벌하는 《개잡이대》를 내왔는데 리홍광이 대장을 담임하였다. 1932년 2월, 그는 반석중심현위 위원으로 조동되여 반석적색유격대 대장을 담임하였다. 같은해 4월, 그는 반석《4.3》반일폭동을 친히 조직하고 령도하였다. 1932년 6월, 중국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동북 첫 항일무장- 만주공농반일의용군 제1군 4종대가 반석지역에서 성립되였는데 리홍광은 대부(隊部)에서 사업하였다. 그후 의용군은 중국공농홍군 제32남만유격대로 개칭되였으며 양정우가 대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교도대 정위를 담임하였다. 1933년 9월, 남만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로 개편되고 양정우가 사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군참모장 겸 제1사 사장을 담임하였다. 지극히 어려운 조건하에서 리홍광과 양정우 등 공산당원들이 령도하는 동북인민항일무장은 동북지역에서 투쟁을 견지하여 일본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1935년 5월 상순, 리홍광은 부대를 거느리고 일본괴로군과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 5월 12일, 조선족항일영웅 리홍광은 상처가 과중하여 료녕성 신빈현에서 희생되였다. 그는 25세의 나이에 중화민족의 해방사업을 위하여 보귀한 생명을 바쳤던것이다. 리홍광이 희생된후 전우들은 그의 유해를 비밀리에 대청골 흑할자망의 큰 호두나무밑에 안장하였다. 리홍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북항일련군제1로군 군가》의 가사에 그의 이름을 써넣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하늘에 높이 걸려서
승리의 군기(軍旗)를 비춰주는 홍광
돌격하라! 우리의 제1로군!
리홍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남만지구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리홍광지대를 창립하였는데 그후 리홍광지대는 해방전쟁터에서 혁혁한 전공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