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식(1909—1942):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 군장
허형식(许亭植)은 동북항일투쟁시기 중국공산당 북만성위원회 위원, 동북항일련군 제3군 군장, 항일련군 제3로군 총참모장 등 중요한 직무를 담당하고 중국인민의 항일투쟁을 위하여 불후의 업적을 남긴 동북항일련군의 저명한 장령이다.
허형식은 1909년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태여났다. 그의 증조부는 리조말기의 귀족이였다. 리씨왕조의 부패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하여 나라는 날로 쇠약해갔고 온 민족이 망국의 비운속에 빠지게 되였다. 그의 가정도 점차 몰락되여 그의 어린시절에는 조부와 부친이 농사를 지어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다. 이때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조선인민들의 대규모적인 의병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허형식의 부친 허일창도 이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일제침략자들과 용감히 싸웠다. 일제의 피비린 탄압으로 하여 의병운동이 실패한후 허형식의 일가는 조국을 떠나 중국 동북으로 망명하였다. 허형식은 어린시절을 빈곤과 동란 속에서 떠돌아다니며 지내다보니 학교문앞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총명하고 탐구력이 강한 그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그가 14살 나던 해 그의 집은 료녕성 개원현 리기태자란 곳으로 이사하여 자그마한 한약방을 꾸려 겨우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봉건군벌정부의 가렴잡세와 각종 명목의 수금으로 하여 생활이 매우 곤난하였다. 그는 15살 때부터 농사일을 하여 집식구들의 생활을 돕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때 개원일대는 조선민족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중요한 지역의 하나였다. 아버지의 교양과 독립운동에 가담한 애국지사들의 영향을 받아 허형식의 어린 가슴은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적개심과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열정으로 불타올랐다.
1929년 봄, 허형식의 일가는 할빈부근의 빈현 가반참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북만의 아성, 주하, 빈현 등 조선족농민들의 거주지역에서는 반일민족독립운동이 기세높이 일어나고있었으며 특히 빈현에는 중국공산당 북만특별위원회의 령도하에 당의 특별지부를 건립하고 최석천동지가 서기를 담당하고있었다. 당조직의 령도하에 농민동맹, 청년동맹, 부녀회 등 군중단체들이 조직되여 반일, 반봉건 투쟁이 광범하게 활발히 전개되고있었다. 애국열정이 들끓는 허형식은 중국공산당의 주장을 열렬히 옹호하였으며 당조직에서 령도하는 각종 혁명활동에 선두적으로 나섰다. 투쟁중에서 그의 계급적각성은 신속히 제고되여 당조직에서 맡긴 임무라면 가정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나섰다.
이때 그는 김정숙과 갓 결혼한 때였으나 안일한 가정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고 당에서 준 비밀사업을 위하여 할빈, 아성, 주하, 탕원 등지로 드나들며 사업하였다. 그는 사업상관계로 한족동지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빌어 부지런히 한어를 학습하여 인츰 한어를 능란하게 하게 되였다. 그는 실제 투쟁의 단련과 당조직의 교양훈련을 거쳐 당에 충직하고 사업을 패기있게 밀고나가는 믿음직한 전사로 자라났으며 1930년초에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0년 4월,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봉건군벌통치를 반대하는 붉은 5월의 투쟁계획을 각지 당조직에 포치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할빈시당조직에서는 중공중앙 만주순시원 림중단(즉 장호)동지의 지도하에 “5.1”절대시위행진을 거행하며 할빈에 주재하고있는 일본령사관에 가서 항의운동을 벌리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중공북만특위는 조선인군중단체 당, 단 서기 강우동지를 할빈부근 각지의 조선인마을에 보내여 당원, 단원들과 군중들을 조직동원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