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학복(1901—1938): 동북항일련군 제7군 군장
리학복, 조선족이며 본명이 리학만이고 일명 리보만이라고도 한다. 1902년 1월 20일(음력 신축년 1901년 12월 11일)에 길림성 연길현 로호산툰에서 태여났으며 1915년에 온 가족이 요하현 삼의툰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집이 아주 가난하여 소년시절에 글공부를 몇년 하다가 부모님이 병으로 돌아간후 학업을 그만두고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는 성품이 바르고 일처리가 공정하며 다른 사람을 즐겨 도와 마을사람들의 믿음을 얻었으며 삼의툰 툰장으로 추대되였다.
1930년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선후로 최석천(최용건), 황계흥, 리말태 등 중국공산당원과 일부 애국지사를 보청, 요하 일대에 파견하여 혁명활동을 전개하고 대중에게 선전교양을 진행하였다. 이런 선전교양을 통해 리학복의 계급적각성이 점차 높아졌다.
그는 툰장의 신분을 리용하여 요하지구에서의 혁명활동을 전개하는데 많은 일을 하여 당지 당조직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933년 봄에 일본침략자들이 요하를 점령하였다. 요하지역에서는 중국공산당의 항일구국의 호소에 따라 반일회조직을 결성하였고 리학복이 총회장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일회 회원은 500여명으로 늘었다. 같은 해 가을에 리학복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3년 8월, 요하현의 반일회는 적들의 파괴를 받았는데 리학복 등 공산당원과 반일회 회원 20여명이 체포되여 감옥에 들어갔다. 그는 감옥에서도 계속 혁명선전을 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죄행을 폭로하였다. 어느날 저녁무렵에 적들은 그들을 살해하려고 리학복 등을 묶어서 사형장으로 끌고갔다. 그들을 압송하는 위만군가운데 항일을 동정하는 리학복의 친구가 있었다.
리학복은 끌려가던 도중에 그 친구의 도움으로 빠져나와 도망을 갔다. 그날 밤에 리학복은 반일대중의 도움으로 요하반일유격대주둔지인 대엽자구를 찾았다. 중국공산당 요하현위원회는 리학복이 계속 지방에 남아 일하는것이 위험한데 비추어 그를 유격대에 남겨 군수장으로 임명하여 전체 유격대의 급양과 군수물품의 조달을 책임지게 하였다.
당시 요하반일유격대는 창설초기에 처해있어 가지고있는 무기란 낡고 허술한 총 몇십자루뿐이였고 탄약도 모자랐으며 옷과 식량도 부족하여 늘 어려움에 부딪쳤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리학복은 대원들을 거느리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총이 있는 사람은 총을 내며 인력을 낼수 있는 사람은 인력을 내고 식량을 낼수 있는 사람은 식량을 내여 항일구국에 참여하도록 대중을 동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