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년간 전국인대 대표를 맏고 있지만 매번 북경에 와 량회에 참가할때마다 신계란대표는 마음이 흥분된다고 말한다. "량회에 참가하는것은 그 책임이 아주 크다!"
대표단 전체회의에 참가하든 소조토론에 참가하든 신계란대표는 언제나 자세를 꼿꼿이 세우고 열심히 청취했으며 자신의 발언순서가 오면 농후한 산서방음, 높은 목소리로 자신의 건의를 표술했다.
1954년 늦가을, 신계란은 당나귀수레에 앉아 산서 평순현에서 출발하여 북경에 왔으며 제1기 전국인대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 참가했다. 제1기로부터 제12기까지, 25살부터 87세까지, 당나귀수레로부터 고속철도까지, 시대가 변했지만 신계란의 신념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인대대표는 인민의 리익을 대표해야 하고 인민을 위해 말을 해야 한다."
신계란은 1929년 산서성 장치시 평순현에서 태여났으며 17살에 같은 현의 서구촌에 시집왔다. 그곳에서 신계란은 촌의 부녀들을 이끌고 로동에 참가했으며 부녀들을 위해 남성로동력과 똑같은 로동보수를 쟁취했다. 그후, "남녀 같은 일자리, 동일한 보수"가 새 중국의 헌법에 기입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