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5)
2016년 04월 25일 15:28【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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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초겨울의 일이다. 그날 동틀무렵에 하늘은 온통 이상야릇한 모양의 짙은 회색구름들로 뒤덮였었다. 허나 헤아리기 어려운것은 하늘 일. 얼마 아니하여 그 많은 구름이 바람에 반반히 걷히였는지 가이없이 푸른 하늘이 시원하게 드러나서 흡사 기분좋은 하루를 축복해주는것 같았다.
적—멸망의 운명에 덜미를 잡힌 낡은 세력—은 그래도 그 더러운 숨통을 유지해보려고 최후발악을 하고있었다. 죽음의 씨뿌리기를 일삼는 무리들이 다시금 해방구를 침노하자 혁명의 태항산은 온통 화약내에 휘감겼다. 굴할줄 모르는 영광스러운 인민의 아들딸들은 다시한번 새로운 시련을 겪어내야 하였다.
“파쑈의 패망은 인제 외통장군 받은거나 다름이 없는데도 놈들은 그걸 달가와하지 않거던. 그러니 우리가 무덤을 파주는 밖에.”
김학무는 아름드리 로목밑에 앉아서 일변 각반을 고쳐치며 일변 나를 보고 말하는것이였다.
“하지만 누구의 말마따나 정화를 일분 앞두고 마지막 총알에 맞아죽는다면 그거야말로 불행이지.”
나는 지금도 그때 그가 하던 말이 속에 걸려서 내려가지 않는다.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가? 느닷없이 그런 불길한 말은 왜 꺼낸담!
“우리가 명월관에 가서 신선로를 먹어볼 날도 인제 멀지 않았네.”
각반을 탄탄히 고쳐치고나서 김학무는 나를 보고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전에 더러 명월관출입을 해본적이 있는가?”
하고 내가 물은즉
“웃기지 말아. 나 같은 빈털터리야 언감생심 그 문앞을 얼씬거릴수나 있나.”
하고 김학무는 싱글싱글 웃었다.
“체, 난 또 먹어나 보고 하는 소리라구. 두 거지가 다리밑에 누워서 큰상 받는 꿈을 꾸는 격 아니야?”
명월관은 서울에서 첫손에 꼽히는 료정이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명월관의 신선로는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난 료리라 한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까지 먹어보지를 못하였다. 그러니 김학무야 더 말할것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나하고 그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그의 남은 생명은 이미 해수나 달수가 아니라 시간으로 따져야만 했기때문이다.
한낮이 좀 기울어서 강냉이쌀미시와 랭수로 점심의 끼니들을 에우고 우리 조 몇 사람은 산등성이 잠풍한 비탈에서 계속 적의 동향을 감시하였다. 그때까지 김학무는 여름에 쓰던 초록색 홑군모를 그냥 쓰고있었다. 우리 전체 대원들중에서 핫군모를 못 얻어쓴것은 그와 작곡가 류신 두 사람뿐이였다. 얼마전에 동복들을 갈아입을 때 어찌된 영문인지 핫군모 두 사람분이 모자랐다. 군수처에서 보충을 해주겠다고 하였으나 불시로 격렬한 “반토벌”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만 아무도 거기다 머리를 쓸 겨를이 없었다. (그후 류신은 전사하였고 정률성도 이 근년에 타계의 객으로 되였다. 당년의 우리 대오에 단둘밖에 없었던 작곡가는 인제 다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