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5)
2016년 04월 25일 15:28【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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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초여름에 히틀러가 돌연 배신적인 반쏘전쟁을 발동하였다. 최초에 쏘련군대는 구풍같이 맹렬한 전격적의 예봉을 막아내기 어려워서 부득이 자꾸만 뒤로 물러나지 않을수 없었다. 나치스의 땅크들은 쏘련국토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그때 일본제국주의강도는 아직 그 광망한 태평양전쟁을 발동하지 않았었다. 우리는 비록 태항산에서 긴장한 전투의 나날을 보내고있었으나 초조한 마음은 밤낮없이 머나먼 쏘독전쟁 제일선에 날아가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대한 레닌이 창건한 최초의 사회주의공화국 하나만의 운명에 관한 일이 아니였기때문이다.
우리는 정치공세의 한 부분으로 “일본군병사들에게 고함”, “조선동포들에게 고함”등의 일본글과 조선글로 된 삐라를 대량으로 찍어내였다. 연후에 그것들을 지하련락망을 통하여 적점령구역에 갖다 살포하였다. 한데 당시 근거지안에는 인쇄설비라는게 마련이 없어서 우리는 부득이 원시적인 석판인쇄에 매달려야만 하였다. 허나 인쇄는 비록 그렇게 어설퍼도 그것이 거두는 효과는 매우 신통하였다. 양제(양계), 심청 등 많은 지식인들과 고철, 김동구 등 많은 학도병들은 우리의 그 원시적인 방법으로 찍어낸 삐라에 끌려서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의 팔로군으로 넘어왔다. 그러한 삐라들의 기초공작은 당시 김학무가 총적인 책임을 졌었는데 그것은 그가 일어, 영어, 한어에 다 능통하였기때문이다. 하긴 그의 영어수준이 우리의 녀대원 허정순에 비하면 다소 손색이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허정순은 미국류학생이 아닌가!
나는 “일본군병사들에게 고함”의 초안을 잡을 때 의식적으로 독일군사상자의 수를 10퍼센트 가량 불려놓았다. 그것은 쏘독 량군 사이의 공방전의 격렬함과 우리의 락후한 석판인쇄, 그리고 그것이 살포될 때까지의 속도의 비례를 감안해서 한노릇이였다. 하긴 보다 결정적인 동기로 된것은 내 가슴속에서 불타는 사랑과 믿음이였다. 허나 심사때 김학무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내가 맞갖잖은 어투로
“어째?”
하고 물은즉
“공보의 수자대로 하지.”
하고 그는 미소를 머금고 대꾸하였다.
“이 맹추야, 석판인쇄가 굼벵이 천장하듯하는데다가 찍어낸걸 아지트까지 날라가재도 두주일은 좋이 걸려. 그동안에도 독일놈들은 계속 무리죽음을 할테지… 안 그래? 그렇다면 삐라가 적의 손에 쥐여질 때는 이미 력사적문헌으로 돼버리잖고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