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3)
2016년 04월 21일 15:09【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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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가을 한구에서 우리 조선혁명청년들에 의하여 조선의용대가 건립되였다.(후에 해방구로 진출하여 조선의용군으로 확대되였다.) 그 골간은 중앙군관학교 졸업생들과 연해안일대 각 대도시의 대학생들로 이루어졌었다. 의용대가 건립된후 한달이 채 못되여서 운명은 우리로 하여금 무한에서 다시 철퇴를 하게 하였다.
철퇴를 하기전에 우리 전체 대원들은 총동원하여 두낮 두밤에 걸친 돌격으로 온 한구시내를 거대한 정신의 보루로 만들어놓았다. 우리는 매 거리의 담벼락과 대문짝들에, 시계탑과 저수탑들에 그리고 지어는 아스팔트길바닥에까지 뼁끼와 콜타르로 일본병사들의 계급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반전사상을 고취하는 표어들을 썼다. 그것들은 모두 귀얄따위 특대붓으로 문짝만큼씩 크게 쓴 일본글로서 그 내용인즉 “일본형제들이여, 착취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말라!”, “총구를 상관에게 돌리라!” 따위였다.
한구에서 여러번 우리 의용대를 방문한바 있는 곽말약선생은 후에 회상기 “홍파곡”의 한절에서 당시의 정경을 매우 생동하게 묘사하였다.
우리는 두 부분으로 나뉘여 무한을 뜨게 되였다. 제1지대는 지대장 방효상(박효삼)과 정치위원 김탁(일명 왕통)의 인솔하에 강남전선으로, 제2지대는 리익선(리익성)지대장과 김학무정치위원이 이끌고 화중전선으로 떠나게 되였는데 나는 제1지대에 속하였으므로 부득이 “고성락일(孤城落日)”의 양자강반에서 김학무와 손을 나누어야 하였다. 우리 제1지대는 기선을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올라가 악양에서 내려 다시 호남, 호북 두 성의 경계인 막부산전선으로 급행군하였다. 우리는 거기서 옹근 한해동안 침략군과 마주 싸웠다.
이듬해 늦은가을, 계림에 설치되여있는 총지휘부에서 소환장이 왔는데 거기 적힌 이름들로는 나외에 심운(심성운), 조소경, 윤치평, 황재연, 리동삼(리동림)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일곱번째 사람의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계림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총지휘부에서 우리 일곱 사람을 제2지대에 조동하기로 결정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며칠후에 김학무가 전위하여 호북에서 우리를 데리러 와서 우리 일행 여덟 사람은 곧 계림을 출발하여 북상의 길에 올랐다. 당시 우리의 행선지인 로하구는 제5전구 사령장관 리종인의 사령부 소재지였다.
전해 가을에 장개석은 꾸두조브의 모스크바초토화작전을 모방하느라고 호남성의 수부 장사시를 불살라버렸는데 그러고도 또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장사—록구간의 철길까지 몽땅 걷어버렸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본인들은 장개석의 대본대로 행동하지 않고 200리 밖에서 멎어버렸다.)
하여 우리는 부득이 륙로를 버리고 수로를 취하여 주주에서 발동기선을 타고 흐름을 따라 내려갔다. 소상강의 가을경치는 나그네의 간장을 녹였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부춘강의 아름다움과도 비길만하였다. 비록 나는 그 선경을 가본적은 없지만서도 나와 김학무—두 젊은 군관은 배전란간에 기대서서 황홀한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았다. 추풍이 소슬하는 강색은 길손에게 전쟁의 소란한 세월을 잊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