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3)
2016년 04월 21일 15:09【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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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이 지나서이다. 내가 혹시 잘못 기억을 하고있지 않았다면 장극가(藏克家)씨가 한수강반에서 그의 공력들인 작품 “꽃피는 봄날”을 발표할 때 우리는 수현전선에서 활약하고있었다. 당시 황기상의 집단군사령부가 대추고장인 조양에 설치되여있었다. 우리는—나와 김학무와 또 다른 몇 사람은—전호에서 두어마장 가량 떨어진 광서부대의 대대부에 머무르며 대적군선전공작을 하고있었다. 한데 그들 광서군장병들의 입버릇—“뜌나마”란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나는 아직까지 모르고있다. 내 짐작에는 아마 매우 고상한 단어나 어휘인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노상 입에 달고있을리 없으니까.
당시 남북으로 100여리에 걸친 전선은 총포성이 잠잠하였다. 적아 량군의 구불구불한 전호는 상거가 불과 수백메터. 매개 중대마다 저격수 몇명씩을 포치해서 주야로 적의 동정을 감시하는외에는 다들 평상시나 거의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하고있었다. 우리는 때로 광서군병사들과 하사관들에게 일본말도 가르쳤다. “총을 바치면 살려준다”, “우리는 포로를 우대한다”, “일본형제들 총구를 그대네 지휘관들에게 돌려대라” 따위를 가르쳐주었다. 한데 괴이한것은 그들이 정당한 말을 배우는데는 혀가 제대로 돌아주지 않아서 애를 먹으면서도 “바가야로”따위 욕설은 아주 수월히 배울뿐아니라 또 금시 써먹기까지 하는것이였다. 그들은 참호속에서 일본군진지에다 대고 목청이 아프도록 그 아름답지 못한 단어들을 웨치는것이였다. 그러면 맞은편에서도 지지 않으려는 일본병사들의 똑같은 큰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오는것이였다. “왕—바—단—!”
어느날 나는 볼일이 있어서 방어선의 좌익을 담당하는 중대를 다녀와야 하였다. 대대부에서 그 중대부까지는 너덧마장 밖에 안되는 거리였지만 마음씨 좋은 광서대대장은 한사코 나더러 제 밤빛거세마를 타고 가라는것이였다. 내 말타는 솜씨가 워낙 오죽잖아서 그렇긴 하겠지만 어찌된 셈판인지 내가 타본 군마들은 례외없이 다 내 솜씨를 꿰뚫어보기라도 하는듯이 내가 가까이 가기만 하면 의례 마뜩잖은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광서대대장의 그 밤빛짐승도 역시 그런 태도로 나를 대하였다. 즉 마지못해 태운다는것 같은 그런 시들한 태도로 나를 대한것이다.
내가 말을 타고 가는 길은 전호 턱밑에 펼쳐진 과수원사이로 나있었다. 그 과수들이 배나무였던지 복숭아나무였던지 인제는 기억이 삭막하다. 아무튼지 볕은 따사롭고 바람은 살랑살랑 극상 좋은 날씨였다. 슬렁슬렁 걸어가는 말잔등에 호사스럽게 걸터타고 봄빛을 만끽하는것은 일종의 향락이였다. 해도 그렇게 안락한 시간은 그리 길지가 못하였다. 일수가 사나와서 나는 얼마 오래지 않아 매우 난처한 지경에 빠지게 되였다.
내 그 향락기분에 잠겨있는 머리우에 삐딱하게 씌여있던 군모가 철딱서니없이 그만 과수나무가지에 걸려서 땅바닥에 떨어진것이다. 사달은 여기서 났다. 나는 휘파람을 휘 불고 말잔등에서 미끄러져내려와 네댓걸음 되돌아가서 모자를 집었다. 한데 내가 다시 돌아와 한발을 등자에 걸고 올라타려 한즉 그 망할 놈의 거세마가 되지 못하게 옆걸음을 치며 나를 근접을 못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숫제 외면을 하고 제 가고싶은데로 갈 차비를 하였다. 나는 슬그머니 화가 나서 쫓아가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고삐를 잡으려 하였으나 좀체 따라잡을수가 없었다. 내가 걸음을 재게 떼면 그놈도 재게 떼고 내가 달으면 그놈도 달았다. 그러다가 마사람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벌어지면서 그놈의 유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참호를 훌쩍 건너뛰여 적아진지 사이의 개미새끼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공한지에 들어섰다. 그놈이 숱한 사람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삐를 질질 끌며 버젓이 적진으로 달려갈 때, 일이 너무나도 돌발적이라서 내나 저격수들이나 다 눈이 멀뚱멀뚱해서 바라보기만 했을뿐 아무도 그놈을 쏴죽일 궁리를 내지 못하였다.
투항하는 군마가 적의 진지로 달려올라가자 호박이 떨어진 적병들은 웬 떡이냐 하고 저마다 손을 내밀어 고삐를 휘여잡았다. 이어 광명을 버리고 암흑을 따르는 유다는 우리 시야에서 꺼진듯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파김치가 되여가지고 터덕터덕 걸어서 대대부로 돌아왔다. 우리는 상부에서 파견되여 내려온 사람이므로 대대장이 비록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지만 그 애석해하는 눈치는 력연하였다. 사랑하는 말을 어처구니없이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을 내 어찌 헤아리지 못하랴. 나는 집안에 들어앉아있기가 괴로와서 훌쩍 밖으로 나와버렸다. 개울가 잔디밭에 가 드러누워서 제가 저지른 일을 되새겨보았다. 이윽고 김학무가 뒤따라나오더니 내옆에 와 퍼더버리고 앉으며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래. 대대장이 벌써 그 말이 지뢰에 걸려서 폭사했다고 보고를 냈는데. 사내대장부란게 고만한 일에 한숨은 다 뭐고 눈물코물은 다 뭐야.”
하고 엉너리를 부리며 내 목을 그러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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