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10)
2016년 05월 03일 13:50【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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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초대급프랑카드
그해 봄 우리 분대는 강진세와 내가 책임을 지고 수현전선에서 대적군선전공작을 전개하였다. 강진세는 지도원이고 나는 분대장이였다.
한번은 전호에서 한마장 남짓이 떨어진 중대부에서 길이가 굉장히 긴 프랑카드 하나를 마련하였다. 폭이 한메터 가량 되고 길이가 20여메터나 되는, 옥양목 옹근 필에다 강진세가 특대붓에 진한 먹을 듬뿍 묻혀가지고 문짝만큼씩이나 크게 일본글로 썼는데 그 내용인즉—“일본병사형제들이여, 무엇하러 머나먼 타국에 와서 아까운 목숨을 버리려 하는가?”, “집안식구들은 그대들이 돌아가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있다.”, “어서 총부리를 그대네 상관에게 돌리라!”
우리는 밤중에 적의 참호에서 150메터 가량 되는 지점에까지 접근하여 여라문개의 대막대기로 그 프랑카드를 벌려세워놓음으로써 날이 밝으면 적병들로 하여금 불가피적으로 마주보게 할 심산이였다. 당시 마주 대치한 량군의 전호는 상거가 불과 수백메터였다. 해도 낮에는 쌍방의 저격수들이 엄밀히 감시를 하는 까닭에 아무도 적아 량군진지 사이의 개활지대로 들어설 감을 못 내였다.
한데 일수가 사나와서 그랬던지 나는 그날 오후에 다른 대원 하나와 깜냥없이 말을 타고 빨리 달리기내기를 하다가 선후해서 둘이 다 락마를 하여 들것에 담겨 들어오는 신세가 되였다. 두 “기마용사”가 다 침대에 누워서 돌아눕기도 힘이 들 지경이니 무엇을 할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이 덜렁이성질때문에 일생동안에 부질없는 곤욕을 숱하게 당하였다. 사람이 타고난 천성은 고치기가 어려운 모양이지?
그날 밤 부득불 나는 빠지고 강진세 혼자서 몇몇 친구들을 데리고 프랑카드를 세우러 갔다. 그것이 음력 스무사흘 전후였다고 나는 기억을 하는데… 그렇기에 그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까지도 하현달이 뜨지 않았지.
이튿날새벽 나는 느닷없이 일어나는 요란한 기관총소리에 놀라깨였다. 문짝밑에다 긴걸상 둘을 괴여서 림시로 만든 침대명색우에서 내가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쓰는 동안에 한방에서 자던 친구들은 제각기 잽싸게 총을 집어들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귀를 기울이고 여겨들으니 그 총성은 분명히 적진에서 울려오고있었다. 이때 옆방에서 운신을 못하는 부상병 “기마용사”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엷은 사이벽을 통하여 들려왔다.
“이봐, 도대체 무슨 란리가 난거야?”
매우 조급증이 난 목소리다.
“낸들 알 재간 있나! 저 친구들이 돌아와야 알 일이지.”
나는 속이 상해서 이렇게 대꾸하였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런 때… 아이구!”
보아하니 그도 골탕을 나보다 덜 먹지는 않은 모양이였다.
한데 이때 돌연히 그 미친듯이 쏘아제끼던 기총소사가 툭 멎어버렸다. 1분이 지나고 또 2분이 지났다. …그러나 사위는 쥐죽은듯 괴괴하기만 했다. 정적, 정적… 전선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이윽고 전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오는데 모두들 싱글벙글하면서 중구난방으로 방금 생긴 일을 나에게 알려주는것이였다. 그 사연을 갈피가려 들어본즉 이러하였다. —동이 트자 왜놈들은 바로 코앞에서 우리의 그 초대급프랑카드를 발견하였다. 하루밤사이에 마귀의 버섯처럼 갑자기 자라난 우리의 그 초대급프랑카드를. 당초에 그 프랑카드에다 대고 미친듯이 기총소사를 했다는 사실은 왜놈들이 얼마나 당황망조했었는가를 잘 설명해준다. 허나 그들은 공연히 탄알만 허비하였다. 우리 그 프랑카드는 기관총탄에 쑤심질을 당하여 벌집같이 구멍투성이가 되여가지고도 끄떡없이 거기 그대로 버티고 서서 일본병사들에게 계속 반란을 호소하고있었던것이다.
조금 뒤져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강진세를 보고 내가 웃으며
“첫인사가 꽤 무던하군그래.”
하고 한마디를 던진즉 그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가지고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밤에 강진세는 또다시 몇 사람을 데리고 기여가서 그 영예의 부상을 당한 프랑카드를 걷어왔다.(적들이 걷어갈가봐) 이것을 안 각 대대 중대의 장병들이 호기심에 끌려서 뻔질나게들 찾아와 그 프랑카드에 “경의”를 표하는 바람에 우리는 그럴바엔 차라리 하고 시원스럽게 밖에 내다 걸어놓고 이틀 동안 전시를 하였다.《진중일보》의 기자량반 하나도 어디서 들었는지 소문을 얻어듣고 쫓아와서 사진까지 찍어갔다.
후에 우리 전체 대원들이 락양을 거쳐 해방구로 넘어들어갈 때, 적탄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그 프랑카드도 유지에 싸서 다른 휴대하기 불편한 좌익서적들과 함께 우리 영사 뒤마당에 묻어버렸다. 40년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간 지금에도 그때 우리가 묻은 그 프랑카드와 서적들은 땅속에 묻힌채로 조용히 임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있을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당년의 나이 젊던 많은 용사들이 인제 영원히 다시 돌아올리 없음을 그것들은 어찌 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