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10)
2016년 05월 03일 13:50【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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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원고료는 없어도
조선의용대 총지휘부에서는 부정기간행물—《조선의용대통신》을 간행하였다. 한편 우리 제2지대에서도 자기의 간행물—《조선의용대통신 한수판(汉水版)》이 간행되였다. 그 주필은 정치위원 김학무였고 강진세, 최계원, 주문파와 내가 상무편집이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거기에 실렸던 모든 실록들—항일전쟁 참전자들의 생동한 수기는 오늘날 몇부 밖에 남아있지 않다. 항일전쟁에 이은 내전의 10여년 전화속에서 거의 재가 되여 이 넓은 국토우에 흩날려버린것이다.
《한수판》을 위해서 글을 쓴이들로는 윤곡흠, 김만, 리조, 박문, 류문환, 림평, 심운, 양대봉, 김위(녀대원) 등 동지를 들수 있다. 그러나 경비를 념출할 방도가 없어서 원고료는 일률로 지불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무를 겸하여 맡아보는 강진세작은아씨는 인정세태에 어두운 몰풍정한 인간이 아니였으므로 때로는 간소한 위로연을 베풀어 그들의 로고를 풀어주군 하였다.(우리의 특약기자 류문환은 후일 ○○신문사의 주필로 되였고 그리고 박문은 ○○통신사의 사장으로 되였다.)
우리 그 기구에서는《한수판》을 내는 한편 또 여러 종류의 대적군인쇄물도 찍어내였다. 즉 일본군과 피점령 구역에 거류하는 조선사람들에 대한 삐라나 통행증(우리 편으로 넘어오는) 따위를 일, 조 두가지 문자로 찍어낸것이다. 그리고 사업상의 필요로 하여 적점령구에서 쓰이는 신분증명서, “량민증” 따위도 위조하였다. 미술가 장지광은 사도의 전문가로서 당자가 우스개소리로 하듯이 그는 혁명의 계명구도(鸡鸣狗盗)였다. 그는 영국신사의 풍도가 다분히 있는 례의바른 사람이였으며 역시 나의 군관학교동창생이였다. 그가 태여난 곳은 서반구 태평양상에 둥실 떠있는 하와이섬—현재의 북미합중국 제50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