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15)
2016년 05월 10일 14:14【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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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부터 졸업을 하는 그날까지 우리 중대 백여명 장래군관들은 모두 문정일의 덕분에 어려운 고비들을 안연히 넘겼다. 그가 전형으로 지목이 된 까닭에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중대장이 의례히 그의 탈만을 잡았기때문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는 문정일의 그늘에서 태평성대를 누린 셈이다.
당시 우리 그 중대에서는 별명이 성행하였는데 그중의 몇가지를 추려서 소개한다면 마춘식이는 “말코”, 장진이는 “락타발”, 림평이는 “가물치”, 호유백이는 “대추씨”, 김인철이는 “대구” 따위인데 이런것들은 각기 그 생김생김에 따라 지은것으로서 그리 멋거리지지 못한 말하자면 좀 저급에 속하는것이다.
이와는 달리 점잖은 좌석에 내놓아도 부끄러울것 없는 상당히 예술적인것들도 적지 않은바 그중의 몇가지를 골라서 소개한다면 김경운의 “우국지사”(이것은 그가 늘 세도의 그릇됨을 개탄하기때문이며), 정연의 “목사”(이것은 그의 성품이 워낙 경건하고 또 설교를 즐겨하기때문이며), 한득지의 “도라지”(이것은 그가 “심심산천의 백도라지”를 멋들어지게 부르기때문이다.)였다.
이러한 별명총중에 새 별명 하나가 더 늘었으니 그것은 곧 문정일이의 “전쟁할 때”였다.
어느날 내가 같은 중대의 하직동이라는 조선학생과 나무그늘에 앉아서 한담을 하다가 슬쩍 지나가는 말처럼
“‘전쟁할 때’ 그치… 어디서 온 작자야?”
하고 물어보았더니
“김학무랑 진일평이랑 같이 중앙대학에서 전학해온치야.”
이렇게 대꾸하며 하직동이는 무엇이 못마땅한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목소리를 푹 줄여서
“그치 좀 덜돼먹잖았어?”
하고 눈치를 살피니
“덜돼먹다뿐이야? 애당초에 사람질 못할 물건짝인데!”
하고 하직동이는 혹독하기짝이 없는 평가를 하였다.
나는 속으로는 적잖이 놀라면서도 사교적인 고려에서
“근사한 말이야.”
하고 발림수작으로 그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그후 항일전쟁시기에 하직동이는 중공당원으로 되였다. 태항산팔로군부대에서 내가 미투리를 삼을줄 몰라 쩔쩔맬 때 하직동이는 자진해서 나를 위해 미투리를 삼아주었는데 그 솜씨는 가히 천하일품이라 할만하였다. 그때 그는 자기가 10년후에 포병학교 교장으로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을것이다.
(다음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