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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3] 6사부대 "녀장군" 김확실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 - 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3)

리 함

2015년 05월 13일 15:39【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김확실 화상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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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에는 “녀장군”이라고 불리우는 한 녀전사가 있었다. 이름은 김확실(金确实), 1916년도 태생, 연길현 상의사 태평구(尙仪社太平沟) 사람. 혁명에 참가하기전의 그녀의 전부 략력이다. 그 시절 상의사 태평구란 오늘의 동불사, 조양천 일대를 가리킨다.

김확실이 15살 나던 해인 1930년은 대중적 5.30폭동이후 연변땅에서 중국공산당 기층구위와 지부가 조선사람들속에서 널리 조직되면서 혁명의 봉화가 드세게 일어나던 해였다. 이해 6월 이후 김확실은 당지 당조직과 공청단의 지도하에 아동단에 가입하고 소선대에 가입하였다. 그는 조직에서 주는 보초, 통신 과업을 번마다 훌륭히 수행하였으며 그해 추수폭동과 더불어 활발해진 주구청산투쟁에서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1931년 가을, 연변땅을 들썽한 구수하일대 추수투쟁에서 김확실은 단련을 받고 시련을 이겨냈다. 1932년 봄 춘황투쟁까지 겪은 김확실은 공청단에 가입하였으며 이해 가을에 새로 창설한 연길현 팔구근거지인 부암-석인구로 들어갔다.

1934년 가을에 김확실은 팔구근거지의 혁명군중들과 함께 삼도만과 사방대를 거쳐 연길현 신선동으로 전이하였다. 신선동은 도목구 상촌으로서 오늘의 안도현 석문진 경내에 자리잡았다. 김확실은 이해 겨울을 신선동에서 보내였다. 하나 신선동은 무릉도원이 아니였다. 원래 식량난에 허덕이던 신선동은 수백명 군중들이 밀려드니 몸살을 앓았다. 팔구인민정부에서 식량운반대를 조직하여 백색구역에 들어가 식량을 얼마간 얻어들이긴 했으나 대부분 식사는 나무껍질과 눈속의 풀뿌리 등 대식품으로 해결하는수 밖에 없었다.

연길현 신선동에서 차츰 민중해산문제가 제기되였지만 김확실은 죽어도 하산하려 하지 않았다. 1935년초에 그는 하산하지 않은 혁명군중들을 따라 안도현 처창즈근거지로 들어갔다.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는 인가가 희소한 안도현 산속에 자리잡았다.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화안촌과 그 일대를 말한다. 이곳 동남차 수림속에는 화룡현 금곡 출신이고 연길작탄의 제작자인 박영순이 책임진 화룡현 무기수리소와 박수환이 책임자로 있는 재봉대가 이미 활동하고있었다. 김확실은 조직의 배치로 작식대원이 되여 무기수리소와 재봉대 20여명 동지들의 식사를 도맡아나섰다.

처창즈에서도 근거지 항일군민들의 식량사정은 극도에 달하였다. 식량은 근본 이어댈수가 없었다. 김확실은 숟가락을 흔들며까지 식량을 아끼다가 사람들과 함께 대식품구입에 나섰다. 얻어들인것이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라 해도 동지들은 그가 손수 마련한 식사면 모두가 입 모아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동지들의 리해와 받들림에 김확실은 가슴이 후더워났다. 그 시절의 김확실은 이미 중공당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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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꽝!” 하는 폭발소리와 함께 화룡현 무기수리소 건물이 온통 폭연과 불길에 휩싸였다. 화룡현 개산툰 자동 출신이고 화룡현유격대에서 활동하던 강위룡이라는 청년이 한두번의 뜻하지 않은 오발사고로 “민생단”이란 억울한 루명을 쓰고 유격대가 아닌 무기수리소에서 보통 탄알 재생작업을 하다가 화약을 잘못 건드렸던것이다. 사람들이 경황없이 무기수리소에서 뛰쳐나올 때 작식대원 김확실은 목숨도 마다하고 무기수리소안에 뛰여들었다. 그는 여기저기 더듬다가 정신 잃고 쓰러진 강위룡을 찾아 업어내왔다.

강위룡의 화상자리는 보기에도 끔찍하였다. 그때 치료라야 덴 자리에 소독수를 붓고 쪼그러붙은 낯가죽을 뜯어내고 와셀린을 바르고 붕대를 처매주니 다였다. 다행한것은 김확실이 간호원으로 나선것이다. 그가 매일 밀을 녹여 덴 자리에 바르고 눈곱을 뜯어주고 발을 씻어주며 극진히 돌보니 환자의 상처는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다.

환난속의 정이란 류달랐다. 처녀와 총각은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문제로 되는것은 결혼이였다. 본의 아니게 “민생단”혐의로 몰린 강위룡은 김확실에게 루가 미친다면서 비밀약혼만 하고 정식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박영순과 박수환 등은 둘이 좋으면 되지 주저할것이 뭐냐며 곁에서 부추켜주었다. 김확실과 강위룡은 처창즈인민혁명정부에 가서 정식 결혼등록을 하였다.

문제는 여기에서 풀리지 않았다. 화룡현 민생단숙반위원회에서는 이들 젊은 부부가 결혼 반달도 되지 않아 김확실을 안도현 만보일대의 왕바버즈쪽으로 추방하고 그녀를 “민생단”혐의자 대렬에 끼워넣었다.

김확실이로 말하면 억울한 루명이였다. 그렇게 숨막히는 아홉달이 흘렀다. 강위룡이 근거지 무기수리소에 소속되여 왕바버즈일대에서 활동하였지만 두 “민생단”혐의자는 만나볼 잠간의 자유조차 박탈당하였다. 강위룡은 무기수리기술이 있다 하여 원 중공화룡현위 마지막 서기 조아범이 지휘하는 화룡2퇀을 따라 남만에로의 원정길에 올랐다. 만남을 기약할수 없는 진짜 영리별이나 다름없었다.

1936년 3월 안도현 미혼진에서 항일련군 2군 지도간부회의가 열리였다. 이 회의가 바로 “미혼진회의”인데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하고 산하에 3개 사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새로 3사 사장으로 부임한 원 왕청3퇀 정위 김일성이 무송현 마안산까지 가보니 2퇀은 교하원정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른바 100여명 “민생단”혐의자들도 림강 마의하쪽으로 식량구입을 가고 없었다. 신임사장 김일성의 명령을 받은 “민생단”혐의자들은 수백리 산길을 헤치며 삼포밀영에로 돌아왔다. 그들속에는 후날 “백두의 불사조”로 이름 높은 연길현유격대 출신 리두수가 있는가 하면 김확실과 같이 한창 피여나는 처녀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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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장군은 람루한 차림의 “민생단”혐의자들을 두고 놀라마지 않았다. 그럴 때 한 녀전사가 불쑥 그의 앞에 나타났다. 보매 키가 늘씬하고 눈이 억실억실하고 용모도 꽤나 이쁘장했는데 한다는 첫마디가 자기는 “민생단”이 아니라는것이였다. 알고보니 이 대원이 평소 성격이 서글서글한 김확실이였다. 그는 1935년 가을 이후 처창즈근거지가 해산된후 본의 아닌 이 특별대오-”민생단”혐의자 대오를 따라 안도현 내두산을 거쳐 무송현 마안산으로 진출했었다.

김확실 등 “민생단”혐의자들은 남만의 무송현 마안산에서 새 삶을 얻었다. 그들을 지지누르던 “민생단”문서 보따리는 철저히 소각되고 그들 모두가 항일련군 제2군의 새 사단-3사에 편입되였다. “민생단”증거 문서장을 불사른 이튿날 그들은 휴식 겸 사냥에 나섰는데 김확실이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그날 잡아들인 7~8마리 메돼지와 노루중 확실이가 노루 한마리를 잡았으니 그야말로 보통내기가 아니였다.

새 사단이 조직되였다는 소문은 나래라도 돋친듯 파다히 퍼졌다. 밀영에서 앓던 부상병들, 숨어지내던 사람들, 원 근거지의 반일자위대원들… 사처에서 사부로 모여들었다. 1936년 새봄에 항일련군 제2군 3사는 무송현 마안산에서의 확건을 거쳐 신속히 장대해졌다. 무송현 동강에 이르니 그 대오는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김확실은 이 3사속의 어엿한 녀전사로 되였다.

1936년 4월 김확실은 김일성이 지휘하는 3사부대를 따라 위만군을 습격하는 무송현 만강전투에 뛰여들었다. 5월과 6월에는 동강부근에서 1군 2사부대와 함께 한 동강툰 위만군병영 기습전, 무송현 서강전투, 림강현 서남차습격전에 참가하였다. 6월 6일 서남차습격전-위만경찰분서 습격전은 전후 10여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8자루의 총도 고스란히 아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전투가 끝난후 김확실 소속부대는 위만경찰분서 건물앞에 야외무대를 꾸미고 문예공연을 하였다. 문예공연은 군민련환모임으로 번져갔다. 군민들은 서로 어울려 돌아갔다. 김확실은 여러 조선족녀전사들과 더불어 “아리랑”노래를 부르며 성수나게 춤을 추었다. 나중에 경찰분서건물에 불을 지르고 성벽과 망루를 짓부셨다. 포로한 경찰들에게는 해설사업을 한 뒤 로자를 쥐여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짧디짧은 두달 동안에 2군 3사부대는 무송현의 만강, 동강, 서강과 림강의 서남차 등지에 신출귀몰하면서 적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안기였다.

김확실이 “녀장군”으로 불리운것은 무송현성 진공 전투에서이다. 당년 무송현성은 장백산기슭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적들의 중요한 군사거점이였다. 일본수비대 30여명과 위만경찰대대 150여명, 2개 중대의 위만치안군 300여명이 둥지를 틀고있었다. 우리 항일련군 제6사와 제4사 2퇀, 만순-리홍빈 등 반일부대 1000여명은 련합으로 무송현성의 적들을 족치기로 결의하였다.

1936년 8월 17일 새벽 3시, 3사 사장 김일성의 공격명령에 따라 6사부대는 사면으로 무송현성을 포위하였다. 제6사의 돌격대는 동산포대를 점령하였으나 동대문과 북대문을 들이치기로 한 반일부대 전사들이 적의 화력망앞에서 배기지 못하고 철퇴하기 시작하였다. 아군의 처지는 아주 불리하여갔다. 아군지휘부에서는 무송현성 진공계획을 포기하고 적을 끌어내다가 족치려고 동산으로 철퇴하였다. 적들은 인차 아군의 뒤를 물며 동산의 골짜기를 따라 올라왔다. 6사부대와 반일부대는 골짜기 좌우쪽에 매복하고있다가 적진에 멸적의 총탄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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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렵에 동산 중심 돌출부의 잘루목―소북구에서 아침식사준비를 하던 7~8명의 녀전사들은 소북구쪽으로 기여드는 적들을 발견하고 반격하기 시작하였다. 김확실은 전호속에서 뛰쳐나와 기관총을 휘둘러 단꺼번에 적 여섯놈을 쓸어눕히였다. “명사수”로 소문난 김정숙은 량손에 싸창 한자루씩 거머쥐고 맹사격을 퍼부었다. 이날 적들은 아군을 량쪽으로 타격하려다가 우리 녀전사들에 의해 격퇴당하고 10여명의 주검을 냈다. 동산쪽에서도 적들은 수십명의 시체를 남기고 패주하고말았다.

김확실은 무송현성전투에서 이름을 떨치였다. 6사부대에서는 그에게 금반지표창을 하였는데 “녀장군”이라는 별호는 이때부터 생겨났다. 1936년 7월, 남만 금천현 “하리회의” 결정에 의해 김확실 소속 제3사는 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로 개편되였다.

1936년 8월 무송현성전투이후 6사부대는 만강물줄기를 따라 되골령을 넘어 장백지대에로 진출하였다. 김확실은 부대를 따라 9월초 2도강 부근의 대덕수, 소덕수 전투에 참가한후 횡산일대에 설치된 후방밀영의 재봉대에 넘어갔다.

“녀장군”이라는 별호가 붙은 이 시기에 남만 원정길에 올랐던 강위룡이 몸성히 6사부대를 찾아왔다. 그때 6사는 장백현 일대에서 일련의 전투를 벌리며 장백근거지 창설에 뛰여들고있었다. 강위룡 등이 도착한 이튿날 김일성이 강위룡을 찾아주고 수십리 떨어진 후방밀영에 가서 김확실을 만나보라고 했다. 강위룡은 우물쭈물하며 어색하여 웃다가 천천히 만나도 된다고 아뢰였다.

강위룡은 주저하다가 김일성이 2퇀과 함께 온 녀전사들을 데리고 가서 동기용 솜군복을 만들라는 과업을 주어서야 드디여 떠나갔다. 적들도 아닌 내부로부터 오래동안 억울하게 강제리별을 당했던 그들 부부는 후방밀영에서 드디여 상봉의 희열을 맛보게 되였다.

1937년 6월 4일 밤 보천보전투를 앞두고 항일련군 2군 6사 김일성은 여러면으로 조선국내의 정세와 보천보일대의 적정을 헤아리는 한편 김확실을 아낙네로 꾸미여 보천보거리를 샅샅이 누비며 적정을 속속들이 파고들게 하였다. 6월 4일 이날, 김확실은 다시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마동희와 어리무던한 농민부부로 가장하고 보천보거리로 들어갔다. 김확실과 마동희는 이날 저녁 타지방으로 부임되여가는 삼림보호구 주임의 송별연회정보까지 얻어냈다. 김확실은 불과 반시간사이에 와닥닥 끝난 보천보전투 승리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1937년 6월 30일에는 항일련군 2군 6사는 형제부대와 함께 조선쪽에서 추격해오는 일제놈들에게 장백현 간삼봉에서 섬멸적타격을 주었다. 전투가 한창 치렬할 때 김확실은 산중턱진지에서 전투에 참가한 2군 4사, 1군 2사의 조선족 녀전사들과 함께 일제히 목소리를 합쳐 우리 민요 “아리랑”을 불러 아군의 사기를 크게 높이며 적진에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이해 겨울 김확실은 부대와 함께 몽강현 마당거우밀영에서 군정학습에 참가하였다. 1938년 봄부터는 압록강연안에서의 춘기공세에 가담하게 되였다.

1938년 하반년이후 동북항일련군의 항일무장투쟁은 간고한 시기에 들어섰다. 이해 11월 제2군 6사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으로 편성되였다. 김확실은 부대와 함께 걸음마다 피어린 전투를 벌리며 도처에서 적들을 타격하였다.

그러던 1939년 2월, 김확실은 몽강현 서패자에서 있은 한 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녀장군”으로 소문났던 김확실은 그때 만 23세밖에 안되였다.

1991년 11월 14일, 김확실 등이 활동한 처창즈항일근거지를 찾은 필자 리함.
래원: 길림신문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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