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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백인75]토템시로 신화를 엮는 시인 남영전

2014년 04월 11일 10:12【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남영전시인은 문학계의 유일한 작가로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에 평선되였다.

감자 캐는 즐거운 농부

근간에 남영전선생을 만나본이들은 대개 이렇게들 인사말을 한다고 한다.

“얼굴이 참 좋아보입니다.”

버릇처럼 활짝 웃음으로 인사를 받는 남영전선생의 얼굴은 편안하게 피여있고 어린애처럼 해맑다.

“이제는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되여 내가 하고싶은 시간에 하고싶은 일을 하는 이 자유가 이렇게 좋은지 진맛을 알게 된거요.”

잔뜩 즐거운 표정이다.

재직시에는 시간에 쫓기고 얽매이고 문득문득 창작사유의 절주가 깨지고… 지금은 책을 아무때건 아무때까지나 읽고 쓰고싶을 때 쓸수 있는 이 자유가 너무너무 좋다고 남영전선생은 말한다.

남영전선생은 신이 난 어린애처럼 단일문으로 줄줄 말타래를 푼다. 퇴직후 3년간에 토템시를 50여수나 썼다. 재직시인 1986년부터 2009년까지 23년간에 쓴 토템시가 도합 52수였다고 한다.

그는 “지금은 너무 쓸것이 많아 매일 책을 보고 사색을 한다. 인류학, 민족학, 민속학, 생태학… 토템문화와 관련된 학문은 깊이 팔수록 모를것이 더 많고 모를수록 더 보고… 하지만 이렇게 하나를 깨우치면 시 한수가 나온다.”라고 말한다. 감자를 캐는 농부처럼 캘수록 주렁주렁 달려나오는것이다. 지금의 그의 일상은 매일 바쁘고 충실하고 재미있다. “내 시간,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한다는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물음 하나”가 준 사명

인생의 목표를 물었더니 남영전선생의 어조는 확고했다. “나한테는 사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물음 하나>에 대답하는것이다! 세마디로 되여있지만 결국 하나라 할수 있다.” 바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我们从哪里来)? 우리는 누구인가(我们是谁)?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我们向哪里去)?”이다.

그는 “나는 어쩌면 이 물음에 대답을 주고저 이 세상에 왔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동안 내가 걸어온 지름길이나 풍파, 고난 이 모두가 나더러 이 물음의 답을 찾게 하는 과정이 아닐가? 나는 이 물음에 대답하는 시를 내놓아야 한다!”

남영전선생은 금방 인쇄공장에서 가져온 길림출판사 출판의 시집 양본을 꺼내보였다. 토템도형을 배경으로 시집의 앞표지에는 “남영전,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南永前 我们从哪里来)”라고 씌여있다. 퇴직후에 새로 쓴 토템시중에서 43수를 골라 이미 발표되였던 52수의 토템시와 함께 총 95수의 시를 이 책에 수록한것이다.

이 시집을 시작으로 “물음”에 대답하는 창작이 본격 가동되였음을 알려준다. “제1집이 나왔으니 내 인생의 3분의 1의 사명을 완성한셈이다.”

이제 올해부터 3년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답을 주게 된다. 따라서 제2집은 “우리는 누구인가(我们是谁)”가 시집 제목이다. 올해 1월 1일부터 제2집에 대한 창작을 시작했는데 벌써 시 몇수의 창작을 마쳤다. 그다음 3년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我们向哪里去?)”에 대답하는것이다.

“그때면 나는 70이 넘는다. 다 쓰고난후에도 정력이 되는 때까지 그 시들을 조명하고 다시 승화하고 만족될 때가지 소처럼 새김질할것이다. 이 사명을 완성하면 죽는다 해도 내 할 일을 하고 간다는것으로 만족이다. 시인으로서 나의 몫을 하고 가는것이다.”

할머니와 장닭이 말하려고 한것은 구경…

남영전의 파란만장 인생과 심오한 토템시의 자초지종을 들어보노라니 문득 그의 인생과 시창작에서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인물이 다름아닌 그의 할머니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은 한 조선족가정인 남씨가문을 말 그대로 멸족하다싶이한다. 광복때 투항하던 일본군이 세균쥐를 풀어놓아 동네에 생긴 무서운 온역때문에 남영전의 할아버지와 두 고모가 3일 안으로다 사망한다. 남영전의 아버지와 삼촌은 해방전쟁에 참가했다가 두장의 렬사증으로 돌아오면서 남씨 두 형제가 모두 희생된다.

참으로 남영전의 초년운은 불운의 련속이였다. 아버지가 참군해 전사하면서 남영전은 엄마배속에서 다섯달이 된 유복자로 되였다. 련속되는 타격에 나젊은 어머니까지 한 많은 세상을 떠나면서 남씨가문 외독자인 어린 남영전은 이 세상에서 할머니와 달랑 둘만 남게 된다.

남영전은 특별한 경력을 되새긴다. 가족을 아래우로 잃은 할머니에게서 홀로 남은 손자 남영전은 가문의 유일한 뿌리였고 실날같은 희망이였고 전부였으리라. 그런데 무심한 하늘은 유일한 남씨가문의 그 어린 싹도 뽑으려 했다. 세살쯤 되던 해 남영전은 갑자기 눈을 감은채 물 한모금 못 넘기고 “죽어”갔다.

갖은 방법끝에 할머니는 마지막 희망으로 멀리에 있는 유명한 “도사”라는 사람을 찾아가 살생부를 받아왔다. 마을 길어구에 있는 산신당에 제사상을 차리고 다리를 묶은 건장한 장닭 한마리를 올려놓고는 시켜준대로 주문을 외우고 또 외웠다. 도사는 “닭이 가면 애가 살고 닭이 죽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라고 한것이다. 하늘의 별따기지만 지푸래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할머니는 주문을 외우고 또 외우고... 과학으로는 설명할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펀펀하던 장닭이 갑자기 세마디 꾸욱 꾸욱 꾸욱 하더니 빨갛던 볏이 까맣게 변하면서 숨이 끊어졌다. 또 기적같이 앓던 애는 차차 얼굴에 화색이 돌고 눈을 뜨더니 물을 찾고 밥을 찾고, 며칠후에는 거짓말같이 일어났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늘 손자에게 들려주셨단다.

밤이면 할머니는 하늘의 별 같이 많은 옛말들을 어린 손자에게 늘 해주셨고 손님이 오면 식사를 대접하고는 밥값을 받듯이 손자에게 옛말 몇컬레씩 들려주도록 하셨다. 날마다 소학교 교실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쌀을 장만할 큰 나무짐을 메고 학교앞 산길을 내려오는 할머니의 모습은 어린 남영전의 가슴속 제일 깊은 곳에 박힌 영원한 기념비로 자리잡았다.

그런 할머니는 남영전에게 깨달음의 씨앗을 심어준 계몽스승이고 철학적사색의 길을 틔워준 도사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남영전의 첫 토템이지 않았을가? 적어도 할머니는 남영전 시 성공의 태모였다. 그 할머니의 모습을 담아 지은 시 “할머니”(1984년)는 남영전의 첫 국가급상으로 1985년 제2차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시가 1등상을 수상하였고 이 시가 수록된 남영전의 첫 시집 “상사집”(相思集)이 1990년 제3차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상을 받으면서 남영전은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토템에서 그 답을 찾는 시인

전쟁의 참상은 어릴 때부터 남영전의 세계관 형성에 깊은 영향을 준다. 현시대에도 끊기지 않는 종교와 민족의 갈등, 전쟁과 테러 등 심각한 사람간의 갈등 그리고 사람과 자연간의 갈등으로 인간의 생존위기가 그 어느때보다도 심각하다. 남영전은 “이는 오늘을 살고있는 현대인들이 정신의 고향을 잃어버렸기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갈등을 해결하는 대안을 인류 공동문화의 하나인 토템에서 찾게 된다.

그는 토템문화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준다고 생각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 물음은 줄곧 이어지며 이 물음에서 예로부터 토템숭배가 생긴것이다. 그때로부터 남영전은 토템 관련 서적과 신화전설을 탐독한다. 그리고 인류와 세계에 대한 사색과 탐색을 시에 담는 시도를 했다.

1986년 겨울의 어느날부터 남영전은 토템물인 달, 곰, 사슴, 백학에 이 사색을 담아 시로 써보았다. 중국시단의 친구들의 높은 찬사를 받고 다시 수정해서 첫 4편의 토템시가 완성되였다. 이 참신한 쟝르의 시 4수가 1987년 9월-10월호 “시인”( 诗人) 잡지의 톱자리에 발표되면서 중국시단에서 큰 반향을 불러온다.

“세상에 둘도 없는”토템시가 이렇게 나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18년의 각고끝에 2003년, 남영전의 42수의 토템시가 완성되여 토템시집 “원융”(圆融)이 세상에 나온다. 이 시집은 2005년 1월 길림성정부 최고상인 장백산문예상을 받은 뒤 7월에는 국가급상인 제8차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을 받는다. 이어 2009년 추가 완성한 10수까지 넣어 총 52수의 시로 작가출판사에서 “남영전토템시집”이 출판되면서 토템시는 명실공히 중국문단에서 립지를 선언한다. 또 토템시로 남영전은 “중국 10대 걸출 민족시인”칭호를 받으며 중국시단에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토템시는 또 남영전을 세계적인 시인으로 그 명성을 가지게 한다. 1991년 이후 토템시는 미국시인이 영문으로 번역하여 영향력있는 “세계시가”, “현대시가”, “대표시인” 등 영문간행물에 발표하면서 1993년 미국세계문화예술원의 문학영예박사 학위도 받았고 그의 이름은 “세계명시인백과사전”에 올랐다. 또한 토템시는 한국에서도 3차 문학상을 받는다.

토템시는 중국 주류문단과 학술계를 통해 그 무게와 함금량이 현시된다. 중국문단에서 “토템시의 명명자, 실천가”로 공인되면서 중국시단의 권위평론가인 오사경으로부터 “토템시는 중국시가발전의 일종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력사적인 평가까지 받는다. 현재까지 국내 대학들에서 토템시 관련 론문 300여편이 나오고 국내외 8개 대학과 학술단체에서 전문세미나 10차가 있었으며 남영전 토템시 연구 저서 13권이 출판되였다. 2009년 절강 호주사범학원은 “남영전토템시연구”를 공공학과로 설치해 교수했고 남영전 토템시 연구는 국내 일부 대학 석,박사 연구생의 졸업론문제목이 되였다. 2011년에는 남영전 토템시내용이 대학입시모의작문시험 제목으로도 선정되였다.

나는 어디까지나 시인이다

얼마전 중국 조선족 주요언론들에서 련합으로 사상 처음으로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을 평선, 각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조선족 20명을 선정했다. 남영전은 문학계의 유일한 작가로 선정되였다.

그 선정리유는 “남영전은 시창작에서 세운 기념비적인 성과만이 아니라 중국조선족문화 발전에 대한 걸출한 기여를 한 문화거장이기때문이다”고 평심원들은 화제를 모았다. 남영전은 개혁개방이후 잡지발행인, 언론인 그리고 조선족사회활동 등 다분야에서 뛰여난 안목과 창신적인 개척능력 그리고 독특한 인격매력으로 조선족문화발전사에 확실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문학지 “장백산”은 남영전의 부호이며 상징이다. 이 잡지는 3차의 위기를 모두 전화위복의 도약판으로 만들며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력, 위기대처능력, 뛰여난 교제능력을 잘 보여준 남영전의 브랜드이다. 1982년 지구재정 압축으로 경비가 없어지는 페간위기를 매년 3만원 운영경비에 독립간행물번호까지 가진 호사로 전환시킨다. 1985년 정책조정으로 귀속단위가 상실되자 잡지를 성작가협회 소속으로 만들면서 성급간행물로 부상시킨다.

1987년 전국간행물정돈 정간명단에 들자 남영전은 “장백산”잡지를 성민위로 귀속되게 하고 성도회지에 옮겨오는 도약을 가져온다. 장백산은”길림성10대 간행물”에 선정된데 이어 2005년 국가신문출판총서에서 선정한 “국가백종중점간행물”행렬에 진입, 조선족문학지가 중국 수만종 간행물업종의 최정상 영예의 전당에 올라선다.

남영전은 길림신문사 사장 겸 주필로 인생에 5년이란 언론인경력도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중국조선족언론사에 아주 귀중하고 무게있는 유산을 남긴다. 2005년 6월 길림신문사에 온지 두달만에 당보 책임자로서 정치적수준과 민족언론인으로서 민족적사명감을 시험하는 사건이 터진다. 바로 장춘공항에서 벌어진 한국귀국로무자 벌금사건이다. 장춘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조선족귀국로무자 몇천명이 일부 집법부문의 위법행위로 인당 5000여원씩 벌금당하는 중대한 집법사건이였다.

많은 매체들 그리고 나섰던 변호사들까지 “감히 범의 코수염을 건드리지 못”하고 손을 들고 나앉을 때 남영전은 신문사 취재팀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위협과 공갈에 배짱있게 정면대결로 맞선데서 끝내 해당 기관은 잘못을 승인하고 피해자들에게 벌금을 돌려주었다. 벌금을 돌려받은 피해자만 600여명에 달한다. 이 사건 해결은 장춘공항이 입국써비스를 적극 개선하는 계기가 되였고 주류사회에서 민족신문의 위상 정립, 조선어신문 금후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준 계기가 된다.

그해 11월, 길림성당위 부서기인 전철수는 성당위와 성정부의 해당 책임자들과 함께 길림신문사에서 현장사무를 보면서 신문사의 간고분투하는 정신과 공항벌금사건 해결 등 백성들에게 실제적 봉사를 한 실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력사적으로 남아내려온 길림신문의 체제문제, 재정문제 등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그해 12월 길림성 당위와 정부는 길림신문사를 2006년부터 성재정 전액지불단위로 격상시켜 길림신문사는 중국 조선어신문 4대 신문지에서 유일하게 전액공익성사업단위로 되였다. 그해 10월 성당위와 성정부 판공청은 련합문건을 내려 길림신문을”성급 소수민족언어당보”로 정식 명명해 성급당보로 확정하였다.

“당신이 그때(1995년) 그렇게 오라고 할 때 북경에 왔으면 벌써 부부급(副部级 )이였겠는데…”

지금도 북경의 한 문단 로간부는 남영전만 보면 타령이다. 일찍 지난 1970년대 후반부터 길림성의 중점후비간부로 지정된 남영전, 그의 뒤순위에 있던 다른 2명은 언녕 성부급(省部级)이상 간부로 되였다. 수차 길림성 정계에서 부임요청 담화가 있을 때마다, 북경의 모 잡지사 주필, 중국작가협회 전직간부로 요청이 왔을 때에도 남영전의 거절리유는 똑같았다. 나는 “장백산”을 떠날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템시의 오늘을 말하며 남영전은 “시를 선택한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명함장을 보면 “남영전 시인(南永前诗人)”이라고 큰 활자로 찍혀있다. 남영전은 “나는 어디까지나 시인이다”라고 말한다. 중국 문단이나 정계에서 넓은 인맥으로 소문난 그에게 사교능력의 비결을 물었더니 남영전은 이렇게 대답한다. “시인은 어디까지나 진정을 추구하고 진심과 관용으로 사람을 대한다. 시인은 선지선각자이며 사유가 트이고 모든것을 포용하는 흉금이 있다. 나는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언제나 시인의 신분으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시인의 품위를 지킨다. 그것이 아주 잘 통했다.”,”나는 시로 세계와 대화한다.”

남영전의 한계와 고민은 무엇일가?

기자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남영전선생과 아래의 대담을 주고받았다.

기자: 지금 가장 큰 고민과 한계가 있다면?

남영전: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재간이 못 따라가는것이 고민이다. 책을 많이 보고 사색의 령역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쓸 내용도 많아진다. 지금 어떻게 쓰는가가 가장 큰 고민이다. 표현양식을 두고 이렇게 깊이 고민한적이 없다.

내 토템시를 두고 어떤이는 남영전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상징적표현이 많기에 리해가 힘들다고 한다. 내 목적이 토템문화로 많은 사람과 대화하려는것인데… 어떻게 하면 누구나 쉽게 편히 읽고 받아들이도록 토템시를 쓸것인가 하는것이 내 고민이다. 그래서 퇴직후 새로 쓰는 시들은 토템의 이야기이고 토템문화를 해석하는 시라고 할수 있다.

기자: 토템문화와 관련 남영전의 주장에 대해 여러가지 이의도 제기되고있는데…

남영전: 나는 절대 토템학자가 아니다. 나는 토템문화를 시로 리해하고 시로 이야기하는 시인이지 학자가 아니다. 토템문화 학습과 연구는 어디까지나 토템시를 쓰기 위한것이다.

시를 쓰기 위해 학자들보다도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 토템 관련 학술연구는 국제적으로 200년, 중국은 100년 정도다. 당대에 와서 관련 서적만 수십종 된다. 모두가 학문이나 리론차원이다. 진정 감오와 깨우침으로 쓴 내용과 실천은 아직 없다. 토템시는 남영전 나름의 감오와 깨우침이라고 생각한다. 시로 그 토템의 정신세계를 파는것이다. 토템시는 인류와 자연,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시로 이야기하는것이다.

래원: 길림신문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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