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1)
2016년 04월 19일 15:01【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
일본침략자렬병식 |
2
“1.28”의 은은한 포성이 멎었다. 영웅적인 19로군이 상급인 장개석의 명령을 거역할수 없어서 눈물을 뿌리며 전장에서 물러난것이다. 김학무와 윤봉길 두 조선청년망명가는 프랑스조계의 한 자그마한 아빠트 뒤방에서 비분강개한 나머지에 부아통들이 터질 지경이였다. 그들은 북간도와 조선에서 각각 일본놈의 등쌀에 못이겨서 상해까지 밀려왔다. 한데 그 원쑤인 일본놈들이 인제 또 예까지 따라온것이다.
윤봉길은 김학무보다 네살이 우인데 그야말로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숭배하는 인물은 오직 할빈역두에서 일본수상 이또 히로부미를 쏴제낀 조선의 민족영웅 안중근 하나밖에 없었다. 이와는 달리 김학무는 이미 맑스-레닌주의를 상당히 접수한 사람이였다. 하여 두 사람은 친동기같이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정견문제로 이따금 론쟁을 벌리군 하였다.
“그래 어떻게 적의 요인만 처단하면 민족의 독립을 되찾을수 있단 말인가? 안중근이 이또를 해치운지도 인젠 20년이나 되는데 어째 일본제국주의는 아직도 망하잖고 점점 더 기승을 부리는지? 어디 수긍이 되게 말을 좀 해보라구.”
“하나만 해치워가지고야 어떻게 되는가? 우두머리들을 깡그리 료정내야지. 한첩 약에 병이 뿌리빠지는걸 본적 있나? 그러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자꾸 제껴야 한단 말일세. 적들이 공포의 도가니속에서 부들부들 떨게끔.”
“소수사람의 용기만 가지고는 민중의 해방을 쟁취 못하네. 개별적인 테로만 가지고는 낡은 세력을 뿌리뽑지 못한단 말이야. 민중의 해방은 오직 민중을 동원해야만…”
“그건 비겁쟁이들의 핑게에 지나지 않아.”
“천만에, 사회과학을 무시하는 정치열병에 걸려서는 아무것도 못해.”
“맘대로 해석하라구. 나는 그래두 내 갈길을 갈테니까.”
김학무가 낮은 목소리로 장엄한 “인터나쇼날”을 부를 때면 윤봉길은 격앙하게 “애국가”를 부르군 하였다. 그들은 이와 같이 각기 다른 곡조를 부르면서 영웅적인 상해시민들과 함께 19로군을 지원하였었다.
그후 운명의 물결은 김학무를 북평으로 밀고 갔다. 어느날 무심코《마이니찌신붕》을 펼쳐본 그는 심장이 금시로 얼어드는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1932년 4월 29일 오전, 상해 홍구공원은 일요일도 아닌데 장날처럼 사람들이 웅성웅성하였다. 수난과 환락은 배다른 자매이다. 한가지 일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굴욕과 재난을 갖다 안기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야수적인 쾌감을 갖다준다. 적들은 상해를 점령한 뒤 지금 여기서 경축대회를 열고 전파를 통하여 전세계에 그들 상승군의 무적함을 대대적으로 선양할 작정이였다.
침략군의 총사령관 시라가와대장, 노무라련합함대사령관 등 일군의 고급장령들이 기고만장해서 주석대우에 버티고 앉은 꼴은 과연 장관이였다.
이때다. 일본전공차림의 젊은이 하나가 손에다 밥곽을 들고 어깨에는 보온병을 엇메고 경계 삼엄한 공원문앞으로 걸어와서 흘러들어가는 인총중에 슬그머니 끼여들었다. 입장하는 사람은 피부색이 다른 서양인기자들을 제외하고는 몽땅 다 일본인들이였다. 그 젊은이는 모자채양에 가볍게 손을 갖다대며 빈틈없는 일본말로 문지기 헌병에게 인사를 하였다.
“고꾸로산데스(수고하십니다).”
퉁방울눈 헌병녀석은 한번 쳐다보고 “흥” 코소리를 내였다. 통과.
젊은이는 곧장 이틀전에 림시로 지은 주석대뒤로 향하였다. 그는 밥곽과 보온병을 나무가지에 걸어놓은 다음 가장 직책에 열중하듯이 꽁무니에서 뻰찌를 빼여들고 땅바닥에 늘어진 여러갈래의 전선과 전화줄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한데 그러면서도 그는 무엇인가를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윽고 대화가 정식으로 시작이 되여서 점령군 “영웅”들이 전세계를 향하여 황군의 “위대한” 전과를 소리높이 선양할 때 젊은이는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나무가지에서 보온병을 떼여내려서 물을 마시려 하였다. 그는 뚜껑을 틀어열자 잽싸게 그 보온병형폭탄의 도화장치를 잡아뽑았다. 그리고는 침착하고도 정확하게 그것을 장군들의 등덜미너머로 주석대 복판에다 뿌렸다. 다음 순간, 주석대는 전세계의 면전에서 박산이 났다. 시라가와대장각하가 즉사를 하였고 노무라련합함대사령관각하의 눈깔 하나가 달아났다. 후에 외무대신이 된 시게미쯔 마모루각하의 다리 한짝도 그통에 떨어져나갔다. 이밖에도 또 숱한 침략자들의 살과 피와 사지가 점령당한 원한의 땅우에 어지러이 흩어졌다.
젊은이는 그 자리에서 피눈이 되여 덤비는 사무라이들에게 뭇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고 반죽음이 되였다.
그로부터 몇달이 지나서다. 일본 전국 각지의 신문들이 일제히 그 젊은이—윤봉길이 오사까감옥에서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실었다. “범인은 태연자약”, “싱긋 웃고 교수대에 오르다” 등등 표제로.
김학무는 윤봉길의 최후를 보도한 그《마이니찌신붕》을 펼쳐든채 사나이울음을 울었다.
(다음회 계속)
 |
홍구공원에서 울린 폭파소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