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전쟁대사기
2015년 07월 07일 14:31【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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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고의적으로 심양교외 류조호린근 철도를 폭파하고 중국군대에 그 죄를 뒤집어씌웠으며 중국군대 주둔지를 포격했다. 9.18사변은 중국인민들의 반파쑈전쟁의 시작을 의미한다.
1935년 12월 9일, 북평학생들은 항일구국시위를 거행하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했다. 이 운동은 전국항일구국운동의 새로운 고조를 불러일으켰으며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건립을 추동했다.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과 양호성이 서안에서 공동으로 “무력행동”을 취하고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을 체포한후 내전을 중지하고 한결같이 항일하도록 그를 협박했다.
1937년 7월 7일 저녁, 일본군은 북평서남의 로구교린근에서 중국군대를 향해 진공을 발동했고 중국 수비군은 맞서 싸웠다. 항일전쟁이 전면 폭발했다.
1937년 9월, 국민당 중앙통신사는 “중국공산당 국공합작선언을 공포”란 문장을 발표하였고 장개석은 담화문을 발표해 중공합법지위를 승인했다. 제2차 국공합작이 정식으로 형성되였다.
1937년 9월 25일, 팔로군 115사가 산서 평형관린근에서 일본군대를 매복습격해 일본군 1000여명을 섬멸했다. 이로써 중국군대는 항일전쟁폭발후 첫 승리를 거두었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은 남경을 함락한후 미친듯이 도살하고 략탈하고 강간하고 파괴했다. 30만명이 넘는 군민들이 비참하게 살해되였으며 남경시의 3분의 1이 파괴를 당했다.
1938년 3월부터 4월 사이 중국군대는 산동성남부 대아장지역에서 일본군의 정예한 2개 사단 주력을 격파하고 1만여명의 적을 섬멸해 항일전쟁 이래 한차례의 중대한 승리를 취득했다.
1939년 11월초, 팔로군은 반“소탕”전투에서 하북 황토령에서 일본 중장 아베 노리히데를 격살했다.그는 항일전쟁 이래 팔로군에 의해 사살된 일본군 최고급별의 장령이다.
1940년 8월 부터 12월까지 팔로군은 화북일본군에 대해 대규모의 진공을 일으켰다. 선후로 105개 퇀 병력이 참전했으며 일본군 2만여명을 살상했다.
1941년 12월부터 1942년 1월 사이 일본군이 장사를 진공하자 중국군대는 힘차게 반격하여 많은 일본군을 살상해 중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전투에서 승리했다.
1942년 2월 25일, 약 10만명 중국군대가 먄마에 진입해 영국군을 지원, 협력해 일본군과 싸워 일본군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1944년 4월부터 12월 기간 일본군은 하남, 호남과 광서 등지에서 대규모 진공을 발동해 대륙교통선을 뚫으려고 시도했다. 국민당군대가 참패를 당하고 대면적의 땅을 적에게 빼앗겼다.
1945년 7월 26일, 중미영 3국은 “일본의 투항을 명령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하고 즉각 무조건투항할것을 일본에 요구했다.
1945년 8월 9일, 모택동동지는 “일구(日寇)에 대한 최후의 일전” 성명을 발표하고 중국인민항일력량은 일본군에 대해 대규모의 반공격을 진행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 히로히또는 “종전조서”를 발표하는 형식으로 “포츠담선언” 접수를 선포했다. 중국인민항일전쟁은 궁극적인 승리를 취득했다.
1945년 10월 25일, 중국전역 대만성 일본군 투항식이 대북에서 거행되였다. 일본에 50년 강점되였던 대만이 조국의 품속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