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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4]녀전사 김려옥의 장렬한 최후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 - 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4)

리 함

2015년 05월 13일 15:46【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항일련군 제1로군의 조선족 남녀장병들(자료사진)

1

가렬처절한 동북항일무장의 피어린 나날 제1군-제7군을 중심으로 한 항일련군 부대들에는 손에 총을 잡고 항쟁에 나선 조선족녀전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의 한 조선족녀전사인 김려옥(金丽玉)은 1918년생으로서 처음에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의 녀전사로 알려졌다. 해방후 김려옥을 글로 처음 세상에 알린 항일련군 녀전사 리윤화(李允华)가 자기와 김려옥이 제2방면군이라고 밝혔었다. 리윤화 회고문-”잊을수 없는 사람”(不能忘记的人)은 1956년부터 편집을 시작하여 그후 륙속 출판된 “성화료원”총서 (“星火燎原”丛书)에 실렸고 1959년 8월에 료녕, 길림, 흑룡강, 연변 인민출판사 련합출판으로 된 “항련녀전사”(抗联女战士)에 실리여 그대로 전해졌다.

그러나 김려옥이 희생되였다는 1936년 7월,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의 전신인 제2군 6사는 남만의 무송일대에서 활동하였을뿐 길림과 료녕의 변계일대에 위치한 류하현에는 가지 않았었다. 어찌된 일일가? 2009년 9월, 전집 제16권으로 새로 출판된 “성화료원”에 리윤화의 회고문 “잊을수 없는 사람”이 다시 실리면서 항일련군 제1로군 즉 1로군 제1군의 전사로 시정되여서야 1936년 여름 그 시절의 김려옥이나 리윤화가 1로군의 전신인 동북항일련군 제1군의 녀전사라는것이 력사사실로 드러났다.

하면서도 우리 조선족들은 50년대 후반 중문으로 나온 “잊을수 없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한데서 김려옥이 누구이고 어디 사람이며 어디에서 어떻게 항일련군에 참가하였는가를 거의 모르고있다. 다만 나어린 녀전사의 빛나는 최후가 중문으로 생생하게 후세에 전해질따름이다.

항일련군의 녀전사 김려옥이 활동한 당년의 류하현 삼원포는 오늘의 삼원포조선족진(三源浦朝鲜族镇)이고 류하현 남부의 중요한 중진으로서 현성 류하와 남으로 45키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류하현의 력사를 보면 이 지구는 1878년 좌우에 개척한 지구로 알려지지만 조선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너 류하현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1910년 좌우로 나타난다. 흥미로움은 조선사람들 이주와 더불어 반일운동이 드세게 일어난것이라 할가.

1911년초에 조선의 갑부로 불리우는 리시영, 리회영(李会荣)6형제는 가산을 팔아가지고 40여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류하현 삼원포로 이주하여왔다. 리상룡, 김동삼 등 애국지사들도 삼원포로 모여들었다. 이해 1911년 4월, 이들은 힘과 재력을 모아 삼원포 서교의 추가구(邹家沟)에 남만의 첫 반일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学社)를 설립하였다. 이해 1911년에 류하와 통화 등지에서 발생한 심한 기근으로 경학사는 인차 해체되지만 1912년 가을에는 삼원포에 경학사를 이은 보다 큰 규모의 반일자치단체-”부민단”(扶民团)이 발족하게 되였다.

경학사와 부민단은 교육발전과 산업진흥을 설립취지로 하면서 1914년까지 류하현 경내에 26개소의 조선인학교를 꾸린 쾌거를 이루어냈다. 이에 앞선 1911년에는 현안의 고산자 대두자에 반일무장투쟁에 대비한 “신흥무관강습소”를 일떠세웠다. 그후 신흥무관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고 부민단의 토대우에서 “한족회”(韩族会)가 세워지기에 이른다. 1919년 11월에는 신흥무관강습소와 더불어 남만일대에서 제일 큰 조선인반일무장단체-”대한군정서” 즉 서로군정서로 발전하니 삼원포를 중심으로 하는 류하현은 조선이주민들과 그 시절 남만지구 반일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커간다.

2

1930년 봄이후 황포출신 등 조선인혁명가들에 의해 류하현에 중공현위와 공청단현위가 조직되고 당이 지도하는 반일유격대가 활약하면서 삼원포와 그 일대에서 항일의 불길은 다시 거세차게 타오른다. 1936년 봄이후에는 항일련군의 녀전사 김려옥이 동지들과 더불어 유서깊은 삼원포에 출현하니 이 고장 항일의 불길은 군중성 항일무장투쟁 지원활동으로 번져간다.

김려옥이 삼원포에서 선참 손을 잡은 사람은 자기보다 두살 어린 조선인처녀 리윤화로 알려진다. 리윤화는 1920년생이고 삼원포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조선인 반일독립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난 처녀였다. 13살 나던 1932년 리윤화는 항일아동단에 가입하고 삐라살포와 통신련락을 다니더니 1934년 2월의 어느날 밤 삼원포부근의 곽가가(霍家街)에 나타나 40여명 부녀들을 모아놓고 항일의 도리를 선전한다. 1935년 봄에는 현안의 홍석라자에 가서 군중회의를 척척 부른다(慈丹 隋昱 许志. 活跃在三统河畔的抗日游击女战士.”党员之友” 2001年13期).

김려옥은 항일련군의 비밀교통망을 통하여 리윤화의 사람됨을 보아내고 그와 손을 잡으니 그때부터 리윤화는 항일련군 제1군의 녀전사로 활동하게 되였다. 리윤화는 김려옥의 지도를 받으면서 당지 부녀군중들을 조직하여 헝겊신을 만든다, 식량을 모은다, 필요한 물자를 구입한다 하면서 항일련군 지원활동을 까근히 짜고들었다. 삼원포와 그 일대에서의 제1군의 영향은 날따라 커만 갔다. 제1군부대에는 조선인장병들이 적지 않게 활동하고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졌다.

1936년 이해 7월의 어느날 김려옥은 비밀행동소조 조장을 맡고 리윤화 등 2명과 함께 류하현 삼원포경찰서의 내부형편을 정찰하게 되였다. 그때 삼원포에는 한무리 일본군수비대와 소본량(邵本良)의 위만군이 주둔하고있었다. 따라서 당지 군중들에게 반일삐라와 내부신문을 배포하고 군중을 조직, 발동하는 사업도 벌려야 했다. 헌데 리윤화 등 두 전사가 병으로 거꾸러진데서 일은 첫시작부터 빗나갔다. 과업은 무겁고 시간은 급했다. 김려옥은 세 사람이 세개 줄에 살포해야 할 삐라와 신문을 한데 묶더니 어쩔바를 모르는 두 전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무들은 너무 조급해 말고 시름놓고 병이나 잘 치료해요. 나 인차 돌아올게요.”

그리곤 지체없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김려옥이 홀몸으로 떠난후 두 전사는 안절부절 못했다.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으나 밤으로 돌아온다던 김려옥은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종무소식이였다. 부대에서는 몇번이나 사람을 띄워 탐문해도 묘연하기만 하였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그날밤 김려옥은 세 사람 분의 삐라와 신문을 지니고 중국인 지하교통원 장아바이가 있는 버덕마을로 숨어들었다. 그는 인차 마을의 지하교통망을 통하여 비밀리에 소형군중모임을 가졌다. 모임에서 그는 우리 항일부대가 도처에서 일제놈들을 족치고있다는것을 소개하고나서 “우리는 망국노로 될수 없습니다. 중국땅에 일본놈들을 들여놓을수 없습니다. 우리는 힘을 합쳐 일본놈들을 중국땅에서 몰아내야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심장을 탕탕 울리는 강렬한 호소였다. 모임참가자들은 항일에 리로운 일이기만 하면 발벗고 나서겠다고 너나없이 다졌다. 모임은 열시가 잘되여서야 끝났다. 김려옥은 군중들의 거듭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200여장의 삐라와 신문을 뿌려야 한다면서 기어이 떠나갔다. 그가 자리를 뜬 뒤에야 사람들은 중국어에 류창한 이 처녀가 조선족이였음을 알았다. 이는 김려옥이 동만 즉 연변쪽이 아닌 남만일대 사람이라는것을 단적으로 알려주고있다.

3

비밀모임에는 지하교통원 장아바이도 참가하였다. 집에 돌아온 그는 담배를 말아피웠다. 김려옥의 말은 음미할수록 심금을 울렸다. 바로 그때 마을 북쪽가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속이 철렁한 그가 문을 빠끔히 열고 북쪽으로 더듬어갔더니 몇몇 경찰놈들이 려옥의 몸에서 삐라와 신문을 앗아내고있었다. 마을밖에 숨었던 10여명 경찰놈들이 이날 려옥이를 붙든것이였다. 장아바이는 놈들과 려옥의 뒤를 미행하다가 그자들에게 걸려들고말았다.

경찰서놈들은 려옥이한테서 무언가 알아내려고 그를 경찰서의 한 으리으리한 방에 안내하고 풍성한 음식상을 마련하였다. 경찰서장놈이 직접 나서더니 부대주둔지와 부대의 작전계획만을 실토하면 당장에서 석방할뿐아니라 어떠한 요구도 들어주겠다고 구슬렸다. 서장놈은 끈덕지게도 달라붙었다. 허나 김려옥의 입에서 튀여나오는것은 “모른다!”는 말 한마디뿐이였다. 악이 난 서장놈은 악명이 자자한 뚱뚱보 경찰놈 “개몽둥이”를 시켜 매질을 들이대게 하였다. 개몽둥이는 지칠 때까지 매질하다가 아우성을 쳤다.

“이 계집년, 말할테냐, 안할테냐?”

“너따위와 무슨 말할 재미가 있느냐. 똑똑히 알려주마. 난 네놈들과 싸우는 사람이다.”

려옥이가 모진 아픔을 참으며 대꾸하자 개몽둥이는 투박한 손으로 려옥이의 얼굴을 냅다쳤다. 그리곤 심문을 들이댔다.

“부대가 어디에 있느냐?”

“산에 있다!”

“어느 산에 있느냐?”

“어느 산에나 다 있다!”

“에익, 독한 년!”

개몽둥이는 욕질하면서 마구 물매를 들이댔다. 려옥이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한쪽에 앉아있던 서장놈이 눈치하자 개몽둥이는 물통을 들어 찬물을 퍼부었다. 려옥이는 가물가물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경찰서장놈이 능청을 떨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말만 한다면 이자리로 자유를 줄테다. 식량은 어디서 난거냐?”

“군중들에게서 얻었다!”

“어디 군중들이냐?”

“온 나라의 군중들이다!”

서장놈은 펄펄 뛰면서 발질을 해댔다. 려옥이는 극심한 아픔을 참아냈다.

“너희들의 무기는 어디서 온거냐?”

“네놈들 개다리의 손에서 뺏은거다!”

이는 려옥이의 마지막 대꾸였다. 놈들이 뭐라고 씨부렁대도 려옥이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적들은 김려옥이를 형장에 내세웠다. 숱한 백성들이 끌려왔다. 생명을 마감짓는 시각 려옥이는 군중들을 둘러보며 열변을 토하였다.

“여러분! 괴로와 마세요. 이 려옥이가 죽어도 천만의 려옥이가 일어나고있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 일제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냅시다!…”

급해난 적들은 이미 파놓은 구뎅이에 김려옥을 악착하게 밀어넣고 구뎅이안에서 작탄을 터뜨렸다. 항일련군의 조선족 녀전사 김려옥의 장렬한 최후이다. 류하현 삼원포에서 한창나이 18살의 뜨거운 심장이 고동을 멈추었다. 김려옥은 피와 생명으로 소속 부대와 동지들의 안전을 담보했다.

김려옥이 희생된후 적들은 장아바이를 석방하였다. 장아바이는 김려옥의 최후를 부대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비바람속을 헤치며 50여리 밤길을 조여 부대주둔지를 찾았다.

김려옥이 동지들의 곁을 떠난지 닷새째 되는 날 밤이다. 장아바이한테서 늦게나마 전우의 자초지종을 듣게 된 부대전사들은 서로 오열을 터뜨렸다. 그들은 다시는 생기로 넘치는 김려옥의 모습을 볼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20년 세월이 흘러갔다. 해방후 50년대 중반이후 당년 김려옥의 지도하에서 항일련군 제1군부대에 참가한 리윤화가 여러편의 회상기를 쓰면서 그중 한편의 글에서 김려옥의 비장한 최후를 밝힌데서 항일련군의 이 녀전사 김려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그러나 이 회상기가 조선족의 중심지구를 떠나 씌여지고 중문으로 발표된데서 이땅의 우리 겨레들은 항일련군에서의 김려옥의 존재를 거의 모르고 지내왔다.

래원: 길림신문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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