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남 인민해방의 길개척자와 정초자 왕덕삼
2018년 09월 13일 09:30【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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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성 대리바이족자치주 상운현 류창진 왕가장의 고색이 창연한 바이족 전통민가가 바로 혁명렬사 왕덕삼이 청소년시기에 생활하고 학습했던 곳으로서 지금은 상운 ‘홍색전승’ 교양기지의 한 부분으로 지금도 완정하게 보전되여있다.
왕덕삼은 원명이 왕무정이고 자가 정린이며 1898년 7월 운남성 상운현에서 출생했다. 1921년 북경대학에 입학했고 얼마 후 중국 첫 맑스주의학습연구단체인 북경대학 맑스주의학설연구회에 참가했으며 1922년 등중하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4년 가을, 중공북방구위의 파견을 받고 왕덕삼은 섬서에 가 당조직을 건립했으며 섬북지구 공산당조직의 창건자와 중요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1925년, 왕덕삼은 북경대학에 돌아와 복학하였으며 선후하여 중공북경구위 위원, 사회주의공청단 북경지구위원회 위원과 경제투쟁위원회 서기 등 직을 맡고 북경로동자운동의 령도사업에 참가했다.
1927년 2월, 그 당시 황포군관학교 정치교관이였던 왕덕삼은 당의 파견을 받고 운남으로 돌아가 사업하게 되였으며 선후하여 중공운남성 특별위원, 림시위원, 성당위 서기직을 력임했으며 당의 제6차 전국대표대회 대표였다.
1927년, 대혁명이 실패한 후 혁명이 저조기에 처했다. 왕덕삼은 운남지방군벌의 실제상황에 근거하여 계속 인민을 령도하여 견결한 혁명투쟁을 전개했다. 중국공산당 ‘8.7’회의 정신에 따라 1927년말, 중공운남성위는 사업의 중심을 철도연선에 옮기자 왕덕삼은 몽자, 개구의 공장, 광산과 운남 남부의 농촌에서 계속 투쟁을 견지했으며 로동자, 농민들 속에 심입하여 간고하게 사업을 전개했다.
1930년 1월, 왕덕삼은 중공운남 제1기 성당위 서기로 당선되였다. 백색테로와 극히 악렬한 환경 속에서 그는 운남성 각급 당조직과 여러 민족 인민들을 령도하여 영용하고도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그는 소수민족 집거지역에 심입하여 민족지역에서 당사업의 경험과 교훈을 참답게 총화하였고 소수민족 군중들에게 당의 주장을 선전하였으며 소수민족 형제들의 계급각오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운남성 남부 소수민족지역의 사업을 대상으로 ‘소수민족문제 대강’의 제정을 주관했는데 이는 운남 소수민족 사업에서 중국공산당의 첫 강령성 문건이다.
1930년 11월, 반역자의 밀고로 왕덕삼은 불행하게 체포되였다. 감옥에서 적들의 위협과 회유에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1930년 12월 31일 왕덕삼은 곤명에서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33살밖에 안된다.
상운현 ‘홍색전승’교양기지관리중심의 주임 왕금경은 전국 각지로부터 해마다 최소 3만명이 왕덕삼 생가를 찾아 영웅렬사를 추모하고있다면서 “왕덕삼은 혁명사업을 위해 귀중한 생명을 바쳤으며 그의 진리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은 우리 모두가 따라배워야 할 바이다.”라고 말했다. 신화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