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6)
2016년 04월 26일 14:25【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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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름길
1
1933년 4월, 상해 프랑스조계.
리경산은 조선청년망명가로서 테로분자였다. 이날 그는 자기 방 침대식등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서《동주렬국지》를 읽는데 재미를 붙여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홀제 아래층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리경산은 경각성 높게 잠시 귀를 기울인 뒤 얼른 손에 든 책을 내려놓고 검은색안경을 집어썼다. 그리고는 습관적으로 잽싸게 침대머리에서 권총을 집어 양복바지 뒤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연후에 살금살금 층계를 내려와 문뒤에 가 찰싹 달라붙었다. 문짝에다 귀를 대다싶이 하고 바깥동정을 살폈다. 또다시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몹시 어려워하고 자신없어하는것 같으면서도 또 찰거마리처럼 검질긴 노크소리였다.
리경산은 직감적으로 그 래방자가 경찰나부랭이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혹시를 몰라서 문을 열기전에 먼저
“사닝아(누구시오)?”
하고 상해말로 물었다.
한데 의외롭게도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조선말이였다.
“문 좀 열어주세요.”
여물지 못한 아이의 목소리다.
리경산은 적잖이 놀랐다. (야, 이게 도대체 웬 놈이야?)
이 아빠트단지안에 자기가 조선사람이라는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상해사람인 아빠트관리인마저 그것을 모르는 형편이다. 그는 종래로 아무에게도 자기의 주소를 알리는 일이 없었다. 그는 자기가 숱한 특무와 반역자들을 처단했다는 사실을 잊어본적이 없으며 또 경찰에 잡히여가기만 하면 모가지가 열이라도 그 숱한 피의 빚을 다 갚지 못한다는것도 잘 알고있었다. 하여 그는 대답도 안하고 또 문도 열지 않았다. 어떻게 할지 질정을 못해서 잠시 망설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문밖의 목소리는 애걸하다싶이 사정사정을 하는것이였다.
“아저씨, 이 문 좀 열어주세요. 예 아저씨, 이 문 좀 열어주세요.”
리경산은 급기야 마음을 질정하고 문을 열었다. 아니나다를가 거기 서있는것은 십칠팔세 가량 나는 사내아이이다. 리경산은 검은색안경알을 통하여 그 불청객을 머리꼭대기부터 발끝까지 한번 죽 훑어보았다. 어리숙해보이는 얼굴은 서양놈의 트기같이 생겼고 머리는 함부로 헝클어져서 쑥바구니 같은데 키는 그리 크지 않으나 어깨가 제법 떡 벌어진 녀석이다. 몸에 걸친것은 기계기름이 묻어서 때국이 흐르는 작업복이고 발에 꿴것은 헌 구두짝이다.
그 수맥 같은 총각녀석은 문을 열어주는 사람의 나이가 한 30도 되나마나한데다가 비록 검은색안경은 썼을망정 호리호리한 몸매며 녀자같이 곱게 생긴 얼굴이며가 다 그리 무섭지 않은것을 보고는 얼른 말씨를 고쳐서 형님이라고 부르며 떠듬떠듬 찾아온 뜻을 말하는것이였다.
“난 저 혁명을 해볼가 해서 왔는데요. 형님, 날 좀 받아주십시오, 형님네 그 혁명당에다, 내 이름은 강병한(강병학)인데 홍구 후지모리자동차부에 있습니다.”
리경산은 문가에 서서 속으로 궁리하기를 (요놈이 도대체 어떻게 낌새를 채고 왔을가? 특무는 틀림이 없는 모양인데… 제길할! 당장 또 자리를 떠야겠군.)
리경산은 마음을 질정하고 일부러 사나운체 눈방울을 굴리며 호통질을 하였다.
“미친놈 모양으로 너 거기서 뭐라고 씨벌거리니? 앙? 냉큼 물러가지 못할가, 앙? 선뜻 꺼져!”
그러고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리경산은 걸음을 옮겨서 이층으로 올라가는체하다가 다시 살짝 돌아와 문뒤에 붙어서서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한동안이 지나도 바깥은 그냥 잠잠하였다. 해도 그는 마음이 안 놓여서 문을 방싯이 밀어열고 고개만 내밀어 사위를 살펴보았다. (조런 망할 놈 같으니, 아직도 꺼지잖고 저 모퉁이에 가 붙어섰네. 틀림없는 특무다. 젠장할!)
리경산은 속이 약간 후들거렸으나 아닌보살하고 문밖에 나서서 그 총각녀석에게
“너 이리 좀 오나.”
하고 손짓을 하였다.
총각녀석은 리경산이 저를 부르는것을 보자 옳다 됐구나 하고 집모퉁이에서 나와서 싱글벙글 웃으며 부지런히 걸어오더니 허리를 굽실하고
“고맙습니다, 형님.”
처사부터 하는데 그 꼴이 리경산이 마음을 고쳐먹고 저를 받아주려는줄 지레짐작을 한 모양이였다.
허나 리경산은 제잡담하고 대들어서 그 녀석의 뺨을 보기 좋게 후려때리며 호통을 쳤다.
“너 요놈, 썩 꺼지지 못하겠니? 어째, 모가지가 거기 달려있는게 원쑤 같으냐? 어디 또 얼씬거려봐라. 아예 그 다리마딜 퉁겨놔줄테니!”
날벼락을 맞은 총각녀석은 기절초풍을 해서 손으로 뺨을 싸쥐고 비쓸거리며 뒤걸음질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