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17)
2016년 05월 12일 15:33【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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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양에서 한달을 묵새기는 동안에 나는 일찌기 하직동이가 내린바 있는 영명한 론단에 대한 신앙이 차츰 뒤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문정일에 대해서 내린 그의 론단이 다시는 “영생불멸”의것이 아닌듯싶어졌다. 우리의 “전쟁할 때” 문정일이가 동란의 나날에 단련이 되여서 다시는 전처럼 그렇게 “사람질 못할 물건짝”이 아님을 발견했던것이다. 비록 그 말라꽹이 존안은 의구했지만.
문정일이는 그처럼 바쁜중에도 시간을 짜내여 따로 나를 초대하였다. 환영연회라는 명목으로 둘이서 오붓이 정주호텔에 가 약식으로 정식을 먹는데 전시라서 그런지 소고기고 닭고기고 생선이고 다 분량들은 그리 푸짐하지를 못하였다. 해도 문정일이는 그러한 정식이나마 제 몫의 일인분을 다 먹지 못하였다. 그러한 정식이나마 나는 물론 친구로서 사심 없는 지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을수 없었다. 문정일이는 량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갈라쥐고 앉아서 경탄해마지않는 눈으로 나의 놀라운 식욕을 구경하고있었다. 내가 바람이 구름을 걷듯이 눈 깜작할 사이에 제것, 남의것을 다 쓸어버리자 그는 감동된 나머지에 진정으로 찬사를 보내왔다.
“맹추, 너 그동안 통 굶어 살았구나. 급료받은건 다 뭘 했니?”
“그래도 난 너처럼,” 하고 나도 례절바르게 답사를 올렸다. “그렇게 뼈하고 가죽만 남진 않았다. 이 가련한 허수아비야.”
부드럽고 포근한 화기가 감도는중에 우리는 네 눈이 마주보며 소리내여 웃었다.
나는 락양에서 여러해만에 “왕시상” 로민이와도 만났다. 그의 체질은 여전히 그렇게 갈대같이 호리호리하였다. 한데 여럿이 함께 소고기국집에를 가면 그는 의례 접대원에게 한마디 “곱쪽으로” 하고 이르는것이였다. 그는 타고난 선병질이였으므로 누구보다도 더 지방질이 필요하였던것이다.
내가 웃으며 그더러 이제부텀 “왕시상”을 “곱쪽”이라고 고치는게 어떻겠느냐고 놀려주었더니 그는 대꾸 않고 그저 빙글거리기만 하였다.
후일 내가 불행하게도 긴 세월—한번은 4년, 또 한번은 10년—징역살이를 하게 되여 옥중에서 기름구경을 통 못하는탓으로 온몸의 살이 내려 피골이 상접했을 때 나는 비로소 로민이가 신봉하는 보건법이 절대로 과학적이라는것을 시인하고 또 감복하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또 자연히 다른 한 전우—주혁이가 신봉하는 과학적보건법에도 생각이 미치게 되였다. 한번은 팔로군부대에서 생활개선을 하는데 늘 한자리에서 같이 밥을 먹어서 내 식성을 잘 아는 주혁이가 나한테 제의하기를 “살고기는 다 네가 먹고 비게는 다 내가 먹고… 어떠냐?”고 했다.
나는 본시 돼지비게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인데 어찌 선뜻 응하지 않을손가? 두말없이 찬성표를 던질 밖에. 허나 속으로는 은근히 의심하기를 (저 자식, 정신착란이 아닌가?)
그러나 후일 철창속에서 기름기가 극도로 부족할 때 나는 주혁이의 과학적보건법에 대해서도 감복해마지않았다. 나는 자기의 지난날의 천박을 뼈아프게 뉘우치고 다시는 그를 정신착란이니 뭐니 의심하지 않았다.
주혁이는 함경북도 길주사람으로 역시 나의 군관학교시절의 동창생이다. 그도 후에 팔로군에 참군하고 또 중공당원으로 되였다. 1950년 가을, 그는 조선인민군의 한 보병사단 참모장으로 인천에서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