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17)
2016년 05월 12일 15:33【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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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집결지점—락양
1938년 한구에서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의 전신)가 건립된후, 두개 지대의 각 분대는 여러갈래로 나뉘여 양자강남북안의 각 전장으로 급행군하여 침략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전투에 뛰여들었다. 그러나 이태 남짓이 그렇게 싸우는 동안에 그들의 뜨거운 항전의 열망과 장개석의 소극적인 항전방침 사이에는 필연적인 모순이 생기게 되였다. 하여 그들은 은밀한 가운데 하나의 공동한 결심을 내렸다.—해방구로 넘어가자! 오매불망의 해방구는 꿈속에서도 그들에게 어서 오라고 손길을 치고있었다.
1939년, 당시 호북 제5전구에서 활약하고있던 제2지대내에 중공의 지하조직이 건립되였다. 그리고 얼마 아니하여 그 조직은 조선의용대 전대의 핵심적인 력량으로 자라났다.
1940년말에서 그 이듬해 이삼월 사이에 화중, 화남 각 전장에 분산되였던 조선의용대의 각 지대들과 분대들이 륙속 북상하여 락양에 집결한 뒤 전대가 황하를 북으로 건너서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넘어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강남에서 북상한 제1, 제3 혼성지대의 지대장은 박효상이고 정치위원은 석정 그리고 두 부지대장은 리춘석(리춘암)과 김세관(김세광)이였다. 제2지대를 령솔한것은 지대장 리익선과 정치위원 김학무 그리고 부지대장 왕자인 및 지하당 책임자 호철명이였다.
당시 조선의용대 락양분대는 전임 분대장 리세영(중앙군관학교 제11기 보병과 졸업생)이 전사한 까닭에 문정일이가 그 후임으로 제발되여있었다. 하여 당지의 분대장인 그는 륙속 당도하는 각 부대를 접대할 중임을 그 두어깨에 짊어지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영사를 마련하고 급양을 보장하는외에도 련락과 통신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문제 그리고 통행증과 도하증명서의 교부신청 등등… 두서를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번다한 일들이 한시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는 밤이고 낮이고 팽이같이 팽글팽글 돌아야 하였다. 한데 더욱 시끄러운것은 그 모든 일을 다 잠시도 경각성을 늦추지 않고 국민당 특무들의 이목을 피해가며 해야 하는것이였다. 문정일은 1940년 1월에 입당하였는데 공작상의 편의와 필요로 하여 그전부터 줄곧 제1전구 사령장관 위립황의 사령부에 주재하고있었다. 그래서 한 조선국적의 중공당원이 국민당군대사령부에 잠복해있다는 기묘한 국면이 조성되였던것이다.
나는 소상강반에서 떠나서 양자강을 건느고 또 한수를 거쳐 수천리 먼길을 넘고 건너 수월치 않게 황하기슭에까지 와닿았다. 옛말에도 “선비가 사흘을 갈라지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하물며 문정일이와 나는 3년 동안이나, 다시말해서 300여개의 “사흘”이나 갈라졌던 셈이니 더욱 마땅히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야 할것이 아닌가. 두 친구가 불길속에서 오래간만에 다시 만났으니 반갑지 않을리 없다. 나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그의 여윈 손을 잡아흔들었다.
“잘 있었나, ‘전쟁할 때’. 한데 어째 살이 전연 안 올랐어?”
내가 이렇게 례절바르게 수인사를 한즉 문정일이도 그 홀쪽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서 내 손을 마주 잡아흔들며
“맹추 왔나? 그런데 대가리가 그렇게 커다래가지고도 아직 버릇을 못 배운 모양이지.”
하고 입이 싸게 대꾸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