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넷 조문판: 한락연의 원명은 한광우이고 자가 락연이다. 1898년 현재 룡정시 공농촌에서 태여났으며 중국 조선족의 걸출한 혁명가, 정치가, 예술가, 사회활동가이고 '중국의 피카소'라고 불리운다. 1919년 '3.13' 반일시위운동에 참가했다. 1921년 상해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우리 당의 원로 채화삼과 친분을 맺고 그의 영향하에 혁명을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2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중국 조선족의 첫번째 공산당원이다. 1924년 중공중앙 조직부장 임필시(任弼时)의 파견으로 심양에 가서 당조직 건립사업을 하게 됐으며 동북의 첫번째 당지부를 건립했다. 이후 초도남, 조상지 등과 함께 할빈에서 중공할빈특별구역위원회를 건립하고 지도자 직무를 맡았다. 1929년 중공중앙의 배치에 따라 프랑스 류학을 떠났다. 그 기간 그는 공산국제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프랑스 공산당이 령도하는 국제반파쑈투쟁과 스페인 공화국보위혁명전쟁에 참가했다. 1937년 양호성 장군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귀국했다. 귀국후 무한에서 주은래, 동필무가 직접 령도하는 '동북항일구국총회'에 참가해 선전과 대외련락사업을 책임졌다. 1939년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리제심이 령도하는 국민당 '전지당정위원회'에서 소좌 지도원을 맡아 산서, 섬서 등 지역의 국공량당 접촉지대에서 쌍방 련락사업을 맡았다. 이 기간 여러번이나 좌권 장군과 팽덕회 사령원에게 중요한 군사정보를 제공했다. 1940년 5월 보계에서 공산당원으로 의심받고 체포됐다. 1943년 당조직과 리제심 등 국민당 상층인사들의 다방면의 구조를 통해 감옥에서 석방됐다. 1943년부터 1947년까지 한락연은 당조직에 의해 중국 서북지역으로 파견됐고 화가의 신분으로 감숙, 청해, 신강 등 지역에서 그림을 그리고 고고발굴을 진행했으며 평화적으로 서북지역을 해방하기 위해 적극적인 통일전선사업을 진행했다. 1947년 비행기 사고로 불행하게 생을 마감했는데 향년 49세였다.
한락연은 중국 혁명에 걸출한 공헌을 한 동시에 예술면에서도 비범한 조예가 있었다. 그는 일찍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프랑스 빠리로 류학 갔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부를 리용해 회화, 사진, 문장 등 형식으로 혁명선전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또 전통문화와 예술을 서로 결합하여 회화와 고고학을 한데 융합시킨 고고회화의 첫번째 사람이 됐다. 그의 유화, 수채화, 소묘, 스케치 등 작품에는 예술에 대한 독특한 견해와 리해가 표현됐으며 그는 중국 예술을 발전시키는 기초에서 서방 예술의 정화도 흡수하여 자신의 독특한 예술풍격을 보여줬다. 그의 많은 진귀한 작품들이 현재 중국미술관에 소장됐다.
래원: 인민넷-조문판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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