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은 과경민족이다. 조선족은 흔히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사이 조선반도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후손들을 가리키고있다.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조선족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동북3성에서 집거생활을 하는 농경민족이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특히는 중한수교 이후 조선족의 이런 거주환경과 종사업종은 급속한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을 타고 조선족들도 하나, 둘 농토를 떠나고 동북을 떠나 연해도시나 해외에서 새로운 삶의 공간을 개척해나가고있다. 이제 조선족은 동북에 주로 거주하는 농경민족이라는 말로 설명할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고있다.
개혁개방 이후, 산업화 도시화의 흐름을 타고 전반 중국 사회가 급속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조선족의 변화가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리유는 아래와 같은 몇가지로 요약해볼수 있다.
첫째는 높은 교육열때문이라 할수 있겠다. 초기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크게 자연재해, 일제의 허위선전 등 리유에 의한 생계형 이주민과 조서ㄴ의 독립과 광복을 위한 투쟁형 이주민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이런 투쟁형 이주민들은 어느 정도의 문화 수준을 갖고있었으며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는 방도의 하나로 “교육”을 내세웠으며 본인이 직접 선생으로 나섰다. 생계형 이주민도 힘든 자신의 오늘을 돌아보며 그 탈출의 방도로 “교육”을 주목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을 학교에 보냈다. 이런 리유로 이주민들이 어느 정도 모여 사는 곳에는 꼭 근대식 학교가 들어섰으며 글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이주민의 삶을 소재로 한 많은 문학작품에는 꼭 이처럼 이주민 동네에 학교를 세우려는 유지인사들과 이에 적극 호응하는 이주민들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때문에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어느 정도 규모를 갖고 있는 조선족마을에는 꼭 조선족학교가 세워져있었다. 연변을 돌아본 하경지가 쓴 시에서는 조선족마을의 특점으로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렬사비”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마을마다 학교”를 하나 더 추가해도 될것 같다.
교육에 대한 이런 열정과 중시가 있었기에 많은 조선족학생들이 대학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국내외의 대도시에 진출하여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있는것이다. 그리고 보다 많은 조선족 젊은이들은 비록 대학이라는 경로르ㄹ 통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튼실한 기초교육을 바탕으로 여러 도시들에서 각자의 빛을 발하고있다. 비록 요즈음 조선족 인구의 감소에 따라 조선족 기초교육이 많이 위축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타민족에 비하여서는 상대적인 우세를 갖고있다. 올해 길림성 대학입시 문과 장원이 조선족학교에서 나온것은 결코 우연이라고만은 할수 없는것이다.
둘째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조선족들의 강렬한 욕망과 개척정신을 들수 있겠다. 청나라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살던 동북을 “룡이 나온 곳(龙兴之地)”이라고 하여 아무도 살지 못하게 하며 누구든 동북에 잠입하면 살인죄로 다스렸다. 하지만 19세기 말엽 이후, 련속되는 자연재해와 일제의 폭압을 피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도강죄”라는 살인죄를 무릅쓰고라도 두만강을 건너 동북으로 넘어오기 시작하였으며 이곳에서 갖은 곤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냈다. “동북의 수전농사는 조선인들이 개척한것”이라는 말속에는 초기 이주민의 피눈물이 그대로 스며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게 한것이 바로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과 개척정신이라고 본다.
중국 이주 초기로부터 몸에 배인 이런 정신은 개혁개방 이후, 특히는 중한수교 이후 또 한번 그 빛을 발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의 길을 걸었다. 조선족들의 내면에 숨겨진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남먼저 포착하게 하였으며 남다른 개척정신은 또 조선족들로 하여금 그 흐름의 선두에 서게 하였다. 20세기 초반에 “도강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넜다면 20세기 후반 조선족들은 “밀입국”이라는 모험을 감행하며 황해를 다시 건넜다. 그리고 국내외의 도시들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한국의 대림, 북경의 왕징, 청도의 청양, 오늘은 가슴뿌듯이 이름 부르는 이런 매 하나의 새로운 조선족집거지는 참으로 많은 꿈과 땀방울과 눈물과 이야기들이 뒤엉켜 이루어진것이라고 할수 있다.
셋째는 한중 두 나라의 발전 격차와 그 리용을 들수 있겠다. 1992년의 중한수교는 조선족에게 절호의 발전 기회를 제공했다. 조선족은 중한 두 나라의 교류와 발전을 위하여 공헌하는 동시에 그 사이에 자신을 키워왔다. 이주민족으로, 농경민족으로 자신이 다루고있는 땅이 거의 유일한 믿천이였던 조선족에게 있어 한국은 산업화, 도시화의 흐름에 합류하는 가장 큰 밑천이였다. 오늘날 국내외 도시의 경제계, 교육계, 문화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과 관련되는 업무 혹은 분야에 있음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문제는 우리가 지난 20여년간 의지하고 활용해오던 한중 두 나라의 발전격차가 갈수록 줄어들고있다는것이다. 아직도 일부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차이가 없지 않으나 지금의 발전 추세로 보아서는 그 차이가 계속 유지되리라는 보증이 없다. 이제 우리는 처음으로 주변의 타민족과 거의 동일한 선에서 산업화, 도시화라는 급속한 변화에 적응하는 경쟁을 하게 되였다. 하루빨리 우리의 새로운 경쟁력을 발굴하고 키워가는것이 필요하다.
조선족으로 놓고 보면 우리 세대는 처음으로 산업화, 도시화를 맞이하는 세대이다. 그러다보니 도시적 삶의 경험이 빈약할수밖에 없다. 농촌을 배경으로 집거생활을 하는 농경사회로부터 도시를 배경으로 산거(散居) 생활을 하는 산업화, 전자화 사회로 무대가 바뀌였다. 농촌을 배경으로 축적된 력사와 문화, 그리고 단일민족 집거생활을 토대로 형성된 사유와 의식으로 다양성을 대표적성격으로 하는 도시에서 살아가다보니 적응이 쉽지 않으며 가끔 문제들도 나타나는것 같다. 도시에서 살아가는것까지는 괜찮으나 도시에 융합되기 어려운것은 바로 이때문인것 같다. 한 도시에 진정 융합되었을 때 우리는 이 도시의 주류사회에 진입할수 있고 나아가 이 도시의 주인이 되였다고 할수 있다.
도시적삶에 대한 적응은 도시화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의 문제이겠지만 조선족같은 경우는 연변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도시에서 소수자로 살아가고있다. 때문에 자신의 실정에 적합한 도시적삶의 방식과 문화를 창출할 필요성이 있다. 조선족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과 문화도 필요하겠지만 각자가 생활하는 지역과 도시의 특성에 적합한 방식과 문화를 만들어가는것이 좋겠다. 이것이야말로 “실사구시”가 아닌가싶다.
래원: 인민넷-조문판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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