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18)
2016년 05월 13일 13:50【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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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메마른 고장
급기야 제1지대가 주류하는 지점에를 당도해보니 부락은 규모가 어지간히 크지만 통 물구경을 할수 없는 메마른 곳이였다. 마을앞의 시내라는것도 바닥이 바싹 마른 조약돌투성이의 모래톱이였다. 주민들은 부득불 오륙마장이나 떨어진 이웃동네에 가서 나귀바리로 물을 실어날라야 하는데 그 우물의 깊이가 또 놀랄만큼 깊어서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혹시 이건 지옥까지 맞뚫리지나 않았나 하는 의혹을 품게 하였다. 각 집에서 쓰는 이른바 세수대야라는것은 국사발보다 한 3분의 1쯤은 작은 걸작품들이였다. 따라서 우리가 마시는 물도 배급제로서 매인당 하루에 군용고뿌로 하나—500그람이였다. 혹시 실수를 해서 쏟지르기나 하면 제 일수가 사나운걸로 자인하고 목구멍에서 단내가 나는 하루를 견뎌야 하였다. 죽어도 보충은 안해주는게 법이였으니까. 얼굴은 매일 아침 륙칠마장 떨어진 개울까지 달려가서 씻어야 하였다. 그러므로 가문 때는 체내에 수분이 부족한탓으로 걸핏하면 코피가 나군 하였다.
그 고장 민가들은 지붕이 모두 평평하였다. 비가 올 때면 주민들은 그 로대식지붕에 고이는 비물을 수채로 받아서 독에 채워놓고 기름이나 술처럼 두고두고 조금씩 퍼내썼다.
마침 우리가 도착한 다음날 한낮께 희한하게 비가 한바탕 쏟아져서 그 바람에 구경거리 하나가 생겼다. 제1지대의 마덕산이와 주동욱 두 친구가 눈 깜작할 사이에 옷들을 홀딱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뛰여나가 마당에 서서 비물로 샤와욕을 시작한것이다. 한데 그들이 전신에—머리꼭뒤에서 발뒤꿈치까지 듬뿍 비누칠을 했을 때 갑자기 비가 그치고, 비가 그치자 이내 구름이 걷히고, 구름이 걷히자 또 곧 해가 났다. 그러니 두 욕객은 삽시간에 비누졸임으로 돼버릴 밖에. 마덕산, 주동욱 두 친구가 매시근해서 머리에 말라붙은 비누거품을 입들이 쓴듯이 마른손으로 비벼떨구는 꼴을 보고 나는 허리를 잡고 웃다가 눈물까지 내였다. 나는 본디 웃음을 참지 못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데 그적에도 아마 눈치코치도 모르고 좀 지나치게 웃은 모양이였다. 마덕산이는 몹시 맞갖잖은듯이 내게다 눈을 흘기며 두덜두덜하였다.
“남은 속이 상한다는데 저 좋아하는 꼴 좀 봐라. 저렬한 인간!…”
내가 그후 20년이 지나서《인민화보》에 실린 “홍기거”수로의 채색사진을 보고 감개가 무량해한것은 바로 이때문이였다. 사람에게 있어서 무슨 일이나 친히 겪어본다는게 얼마나 중요한가.
마덕산은 경상남도 창원사람으로 나의 군관학교시절의 동창생이다. 그는 경상도사투리로 “새까 새까 날아든다”— “새타령”을 잘 부르는것으로 유명하였다. 1942년 가을, 그는 북평에서 다른 한 조선의용군의 성원인 김석계와 함께 군사간첩죄로 일본 군법회의 즉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총살형은 이튿날새벽 일본헌병대본부 후원에서 14명의 총수로 편성된 행형대에 의하여 집행되였다. 형이 집행되기 림박해서 마덕산은 눈을 싸매는것을 거절하고 오연히 버티고 서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마덕산의 이 영웅적최후를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서 민족의 량심을 되찾은 일본헌병대의 조선인통역 하나가 후에 팔로군부대로 의거해 넘어왔다. 그가 아니였더라면 우리는 마덕산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