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20)
2016년 05월 17일 13:48【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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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후위사령의 공술(1)
1941년 중춘에서 중추 사이에 조선의용대 각 지대, 각 분대는 모두 네개 그루빠로 나뉘여 락양에서 황하를 북으로 건너 륙속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들어갔다.
문정일이는 갖은 방법을 다 대여 제1, 제2, 제3진을 띠염띠염 떠나보낸 뒤 저는 끝까지 남아서 뒤수쇄할 책임을 짊어졌다. 그리하여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나서야 비로소 제4권—마지막 그루빠를 인솔하고 국민당통치구역을 벗어나 해방구로 북상하는 행군길에 올랐다. 하여 그는 자연히 전대의 후위사령으로 된것이다.
허나 예측하기 어려운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4분의 1세기가 지나서 그 력사상 류례를 볼수 없던 시기에 우리의 “전쟁할 때” 문정일이는 불행하게도 령어에 매인 몸이 되여 특무니 반혁명이니 하는따위의 듣기만 해도 몸이 오싹해지고 뼈가 자릿자릿해나는 끔찍스러운 죄명을 들쓰고 부득불 그 손에 악당들이 억지로 쥐여주는 모지랑붓을 들고 이른바 “공술서”라는것을 써야만 하였다. 다음에 적은것이 바로 그중의 한 대목이다.
1941년 가을, 팔로군락양판사처(통칭 락판)는 비밀히 위립황장관사령부 참모처 소위참모 왕모(중앙군관학교 제13기 졸업생)를 통하여 나더러 “락판(洛办)”에 일이 있으니 오늘밤 좀 다녀가라고 전갈하였다. 밤에 내가 가본즉 “락판” 일군이 전달하기를 조선의용대본부에서 무전이 왔는데 나더러 곧 락양을 떠나서 태항산으로 들어오란다는것이였다. 나는 벌써부터 학수고대하던 일이 드디여 닥쳐온지라 너무도 흥분하여 건밤을 새우다싶이 하였다.(당시 한빙부부도 나하고 동행하려고 락양에서 대기하고있었다.)
이튿날 나는 조선의용대 각 분대가 대부분 황하이북의 화북전선에서 활약하고있다는것을 핑게 대고 시찰을 가겠으니 도하증과 통행증을 발급해달라고 곽기기참모장에게 신청을 하는 한편 짝을 무어 동행할 목적에서 화북전선으로 떠나는 부대인원들을 물색하였다. 마침 방병훈부대의 대대장(할빈사람) 하나를 알게 되였는데 그 사람은 장관사령부에 와서 군의 월비(현금)를 타가지고 부대로 돌아가려는 참이였다. 당시 그들의 부대는 황하이북 림현부근에 주둔하고있었다. 림현은 산서, 하남 두 성의 성계가 맞닿는 어름에 위치하고있는데 거기서는 태항산해방구가 지척이였다. 하여 나는 그하고 동행할 날자를 어림잡아 약정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도하증과 통행증을 발급받아야만 길을 떠날수 있었기때문이다.
미구에 내 증명서가 먼저 내려와서 나는 곧 “락판”을 찾아가 떠날 날자를 알리고 또 조선의용대본부에 무전으로 통지해줄것을 부탁하였다. 한즉 “락판” 일군은 가는 길에 중국동지 몇 사람을 좀 데리고 갈수 없겠느냐고 의논을 걸어왔다. 지난번에 떠나오라는 전보를 받았을 때 “락판”책임동지에게 나는 길을 잘 모르는데 혹시 “락판”에 누가 동행할 사람이 없겠느냐고 물어본적이 있었으므로 나는 두말없이 쾌히 응낙하였다. 내가 이렇게 선뜻 응낙을 한것은 도하증이나 통행증의 기입란이 모두 공백인 까닭에 인수를 내 맘대로 기입할수 있었기때문이다. 그저 덧거리로 기입된 사람들이 조선의용대 대원인체만 하면 되는 판이였다. 의논이 합치되자 그 “락판” 일군은 곧 곽대광(현재 길림에 있다.)을 불러다가 나에게 소개하고나서 건의하기를—곽대광은 우리 판사처에서 태항산총사령부로 갈 20명 인원의 책임자이다. 허니 문정일이 네가 대장이 되고 곽대광은 부대장이 되라. 그리고 총책임은 너 문정일이 지고 전대를 령솔하는것이 좋겠다 했다. 하여 나는 그 즉석에서 곽대광이와 떠날 날자와 시간 그리고 집합지점을 약정하고 헤여졌다.
예정한 날자에 우리는 방병훈부대의 그 대대장과 그가 령솔하는 수십명 병사들과 만나 동행을 하게 되였는데 우리 대오에는 한빙부부외에도 윤지평, 리화림(녀대원), 데라모도 아사꼬(조선의용대에서 활약한 일본녀성으로서 조선이름은 권혁) 등등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무사히 황하를 건너고 또 적군, 괴뢰군의 봉쇄선들을 통과하여 초작현 현정부 소재지인 중조산중의 한 대부락에 이르렀다. 물론 거기는 국민당의 통치구역이다. 동행한 대대장과 그의 부하들은 부락안에 사처를 정하였고 우리 30여명은 현정부에서 몇마장 가량 떨어진 자그마한 마을에 려장들을 풀었다. 그러나 나는 국민당 정부인원들이 알게 되면 의심을 살것이 념려되여 즉시 곽대광과 의논한 뒤 내 전령병 한화성이와 “락판” 사람 하나를 데리고 주동적으로 국민당 현장을 찾아갔다.
나는 현장을 만나서 명함을 드리고 또 수인사를 마친 다음 우리 조선의용대가 당신네 현을 거쳐 전선으로 대적군공작을 나가는데 귀 현에 페를 끼치게 되여 미안하다고 얼렁뚱땅하였다. 한즉 현장은 매우 뜨겁게 나를 대해주며 귀한 손님들이 마을밖에 사처를 잡다니 그게 어디 될 말인가, 어서 옮겨들도록 하라, 저녁에 박주나마 차려서 여러분을 모시겠다, 그래야 우리도 주인된 체면이 서지 않느냐고 하였다. 나는 현장선생의 호의는 매우 감사하다, 그러나 적의 봉쇄선을 넘느라고 일행이 모두 지쳐서 이미 휴식들 하니 다시 옮기는 수선을 피울것은 없다고 그럴사하게 응수해넘겼다. 우리가 사처로 돌아와 얼마 오래지 않아 현장은 전인을 파견하여 전선으로 나가는 외국벗들을 위문한다고 로획품 소고기통졸임따위를 푸짐히 보내왔다.
거기서부터는 국민당군대가 관찰하는 산로를 가야 하는데 방병훈부대의 대대장 일행과는 동행할 필요가 없게 되여 우리는 우리대로 따로 행군로선을 선정해야 하였다. 나는 양계소(현재 외교부에 있다.)와 손초(현재 중앙통전부에 있다.)를 행군참모로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행군로선을 선정토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