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20)
2016년 05월 17일 13:48【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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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후위사령의 공술(2)
진성, 호관, 평순 등지를 지난 뒤에 우리는 국민당군대의 방비구역을 벗어날 준비를 하였다. 초병선을 넘어 해방구로 들어가기전에 우리는 두메산골에 자리잡은 한 자그마한 마을에 들어서 우선 손초에게 길잡이—당지의 농민—하나를 딸려서 팔로군부대를 찾아가 련계를 취하도록 하였다. 이튿날 그 길잡이농민은 손초의 편지를 몸에 지니고 혼자서 돌아왔는데 그 편지를 뜯어본즉 거기에는 자기가 온 길이 안전하여 국민당군대가 없으니 이 편지를 전하는 길잡이농민을 앞세우고 곧들 떠나오기 바란다, 산등성이 하나만 넘으면 그 맞은바래기 산등성이가 곧 해방구인데 거기까지 마중하는 부대를 파견할테니 안심하고 행동하라… 이러한 사연이 적혀있었다.
손초의 기별을 받고 우리가 막 길떠날 차비를 하고있을즈음 불시에 국민당군대의 한 부대가 우리의 마을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모두들 긴장해나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즉시 덤비지 말고 다들 도로 들어가 누워서 자는체하라고 지시한 뒤 전령병을 데리고 주동적으로 그 국민당군대의 지휘관을 찾아갔다.(그가 대대장이였던지 련대장이였던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 지휘관에게 명함을 드리고 또 자기소개를 한 다음 그럴사하게 꾸며대기를 나는 조선의용대의 일부 대원들을 인솔하고 방병훈부대로 가는 길인데 동행하는 대대장일행의 걸음이 더디여 우리는 먼저 여기 와 휴식하며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는중이라고 하였다. 그 지휘관은 내 말을 유심히 듣고나더니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하면서 락양장관사령부에 중앙군교 졸업생이 몇이나 있으며 그들의 이름은 무어며 또 직함은 무엇인가고 바로 나를 떠보려 들었다. 나는 막히는데 없이 그가 묻는 사람들의 근황을 다 이야기하고나서 그도 중앙군관학교 졸업생인가고 물은즉 그렇다고 하기에 나도 역시 중앙군교 졸업생이라고 자기소개를 하였다. 하여 우리는 곧 서로를 동학 즉 동창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지휘관이 나를 집안으로 청해들여서 나는 들어가 자리잡아 앉는 길로 다시 진일보하여 장관사령부에 있는 중앙군교 졸업생들의 근황을 소상히 이야기해드렸다. 내 이야기에 빈구석이 없을뿐아니라 내 군복가슴에 제1전구 장관사령부의 출입증이 달려있는것을 보고 더는 의심할나위가 없는 모양으로 그의 미타해하던 기색은 현연히 풀리였다. 하여 그는 군용지도를 꺼내서 펼쳐놓고 일일이 가리켜보이며 너희가 택한 길은 대단히 위험하다, 산 하나 넘으면 곧 “팔로”네 구역이다, 그러니 내가 우리 사람 몇을 파견해서 너희를 안전한 지대까지 인도해주마고 하였다. 나는 아니, 번페스럽게 그럴 필요는 없다, 인제 방향을 알았으니 우리끼리도 능준히 찾아갈수 있다, 정 어려우면 당지의 길잡이를 얻어도 되니 념려 말라고 그의 호의를 밀막았다. 그는 제 사람을 파견해서 우리를 인도해주겠다는 주장을 더는 고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실토하기를 저희는 초병선에 교체를 하러 가는 부대이므로 여기서 점심만 지어먹으면 곧 다시 떠나간다고 하였다. 그는 점심식사를 같이하자고 나를 붙들었으나 그때 식사를 같이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들이 떠나가는것을 바랜 뒤에야 비로소 나는 사처로 돌아왔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 사람들은 모두 꼼짝 않고 누워서 자는체들 하고있었다. 내가 다녀온 경과를 이야기하니 그제야 모두들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당일이던지 그 이튿날이던지 아무튼 우리는 다시 그 길잡이농민을 앞세우고 깊은 골짜기 하나를 건너서 맞은쪽 산등성이에 바라올랐다. 골짜기의 바싹 마른 내바닥을 달아서 건늘 때 우리는 국민당군대의 특무 두놈과 맞닥뜨렸다. 그중 한놈은 우리를 보자 걸음아 날 살려라 뺑소니를 쳐버려서 한놈밖에 못 붙들었다. 붙들린 놈도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있었다.
우리는 드디여 팔로군 주둔지에 들어섰다. 한개 중대의 병력(아니면 한개 대대의 병력)이 우리의 마중을 나왔었다. 우리는 모두 격동되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너무도 기뻐서 감격의 눈물만 자꾸 흘렸다. 오직 한 사람 내 전령병 한화성이만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였다. 우리는 사전에 우리의 행동과 목적을 그에게 알리지 않았던것이다. 동행한이들이 그에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계급교육을 해서야 비로소 그는 사상이 달통되여 좋아라고 날뛰였다.(1942년에 한화성이는 태항산 항일대학에서 적의 “토벌”을 만나 일떠나 응전하다가 애석하게도 전사하였다.) 거기서부터는 팔로군 전우들의 극진한 보호밑에 아무 근심걱정 없이 행군을 계속하여 마침내 모두 무사히 태항산 동욕 조선의용대본부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