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13)
2016년 05월 06일 13:18【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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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망치와 낫
이튿날저녁무렵에 마을밖 잔산밑 잔디밭에서 사령부직속단위의 전체 인원이 참가한 무슨 모임이 있었다. 강진세와 내가 초청을 받아서 참가한것은 두말할것도 없는 일이다. 그때 “7.7”과 “8.13”은 이미 지났고 “9.18”은 아직 못되였으므로 무슨 돐을 기념하는 모임만은 아닌상싶었으나 거기서 다루어진 구체적인 내용은 전연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하지만 내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것은 개회벽두에 전체가 기립하여 “인터나쇼날”을 부른것이다. 그것은 내가 생후 처음 공개적인 집회에서 마음껏 큰소리로 불러본 “인터나쇼날”이였다. 언제나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무산계급의 노래였다. 그리고 또 나는 바로 그 회장에서 난생처음으로 우리 당의 기발—망치와 낫이 수놓인 붉은기를 보았다. 격동되여 글썽한 눈물을 머금으며 나는 가슴속에 부풀어오르는 파도를 가라앉히느라고 한동안 애를 썼다. 우리를 배행한 근무원동지는 나의 격동한 모양을 보고 의미있게 빙그레 웃었다. 그의 나이는 당시 아직 스물이 채 못되였어도 그런 경력으로 말하면 대여섯살 우인 나보다도 선배였다.
그 집회에서 나는 또 녀자 부사령원 한분을 보았다. 그전에 나에겐 녀자가 군대에서 지휘관노릇을 한다는것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녀가 만약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고희도 인제 지났을것이다. 내내 건강하고 또 기력이 왕성하기를 비는바이다. 그 녀부사령원의 소경력도 나는 근무원동지에게서 들었다. 우리가 대홍산에 머물러있는 동안 식사, 세탁을 비롯한 모든 생활상의 허드레일은 그녀가 다 맡아서 해주었었다. 하여 나는 떠나오기전에 내 소지품중에서 손거울 하나와 접칼 하나를 그녀에게 선사하여 다소나마 사의를 표하였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이름은 잊어서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당시 나는 지하공작규례에 따라 성은 검을 려자 려가로, 이름은 외자이름으로 건장할 건자 려건이라고 변성명을 하였었다. 만약 이 세상에 기적이라는게 정말로 있다면 그녀가 혹시 내 이 글을 읽어볼수도 있을는지 모를 일이다.
한번은 우리가 여해암이하고 공작문제를 토의하고있는데 일본군포로병 하나가 그를 보러 왔다. 둬달전에 신사군부대는 우리가 바로 며칠전에 건너온 그 군용도로에서 적군 치중대의 트럭 한대를 로획하였다. 호송하던 하사관은 저항하다가 맞아죽고 일등병운전사 하나만이 사로잡혔는데 바로 그 일등병운전사가 지금 대적군공작과 과장을 찾아들어와서 공작을 배치해달라고 요청을 하는것이였다. 보아하니 최초의 어진 혼이 빠졌던 상태에서는 얼추 회복이 된 모양이였다.
“그대가 할수 있는 일이 무에 있나?”
하고 미끈한 일본말로 여해암이가 물었다.
“과장님, 아시다싶이 저는 운전사입니다. 자동차 한대만 마련해주십시오. 정의의 사업을 위해서 힘을 바치겠습니다. 재생지은을 갚겠습니다.”
일등병은 깍듯이 이렇게 대답을 올렸다.
“어, 그렇지만 그대의 그 자동차는 이미 태워버렸어, 아깝긴 했지만 부득이 그렇게 안할수 없었어.”
“아니올시다, 다른 차도 됩니다.”
하고 일등병은 얼른 말을 뒤받았다.
“어떠한 류형의 차도 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시간이 좀 걸리겠는걸.”
하고 여과장은 느릿느릿 말을 하는것이였다.
“그대도 보다싶이 우리는 아직 자동차가 없거던.”
운전사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현연히 떠올랐다.
“그렇다면 얼마나 기다려야 되겠습니까?”
“그건…”
하고 여해암이는 익살맞은 눈으로 우리를 한번 돌아본 다음 다시 느릿느릿 말을 잇는것이였다.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한 이삼년 걸릴가, 아무튼 맘을 느슨히 잡고 기다려봐, 때가 되면 꼭 분배해줄테니.”
일등병의 얼굴에는 어색한 웃음이 떠올랐다. 할수 없다는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동정을 구하듯이 우리를 한번 돌아본 뒤 여과장에게 깍듯이 거수경례를 하고(그는 신사군의 초록색 새 군복을 입고있었다.) 표준동작으로 뒤로 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포로가 나간 뒤에 여해암이는 그의 요청에 대해서 가타부타 평론을 하지 않았다. 더 두고 고험을 해보아야 알 일이기때문이였으리라.
당시 즉 우리가 머물러있는 동안 일기가 좋은 날이면 의례히 해가 설핏할무렵에 적군의 단엽정찰기 한대가 날아와 공중을 선회하는것이였다. 그 정찰기는 장대로 휘두르면 맞아떨어질것 같은 저공을 나는데 속도도 느리기가 시속 령킬로메터가 아닌가 의심이 들 지경이였다. 일언이페지하면 안하무인격으로 지상의 생령들을 깔보는것이였다. 하건만 지상에서는 단 한방의 총도 쏘지 않아서 산골짜기는 쥐죽은듯 괴괴하였다. 전술적인 의도에서 목표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했을걸로 짐작이 가기는 한다. 그러나 후일 조선전장에서 전개된 “비행기사냥군조”운동을 보니까 적기들이 얼씬만 하면 통일적인 지휘자 구령이 없이 지상의 모든 화력기재들이 제가끔 대공사격을 개시하는데 그 효과는 볼만한것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대홍산의 그 오만무례하던 정찰기 생각만 나면 그때 통쾌하게 쏘아떨구지 못한것이 못내 분한 느낌이 있는것이다.
이밖에 또 하나 돌이켜보면 재미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일이 있다. 우리가 대홍산에 머무는 한주일 남짓한 동안에 모두 스무나문끼 식사를 하였는데 주식은 입쌀이였으나 반찬은 시종일관 숙주나물 한가지뿐이였다. 하여 나는 속으로 헤아려보았다. (취사관리원량반이 숙주나물에서 특수한 영양가를 발견해내잖았나?)
하여 나는 뒤구멍으로 그에게 별명 하나를 지어주었다—“비타민 A—Z”.
후에 나는 팔로군에 전입해서 입쌀, 숙주나물은 고사하고 소금도 못 얻어먹는 신세가 되여버렸다. 그제야 나는 지난날 자기의 식도관(食道观)이 얼마나 유치하고 천박했는가를 깨닫고 복에 겨워서 저지른 잘못을 뼈아프게 뉘우쳤다. 그리고 신사군의 그렇게 훌륭한 취사관리원을 타박한 죄를 톡톡히 받아서 싸다고 시원스럽게 자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