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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백인40]무용은 후회없는 선택이였고 삶의 전부였다

-중국 조선족의 이름난 안무가 “탁월한 무용가” 최옥주

2013년 07월 29일 10:01【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1990년 10월, 연변가무단의 중량급 대형무용극 “춘향전”이 북경아시안게임 예술축제에서 국내외 관중들로부터 높은 평판을 받았다. 중국의 문예계의 권위인사는 심지어 “춘향전”을 우리 나라 “7대 민족무용극”의 하나라고 극찬하면서 사람들을 도취시키는 하나하나의 화려한 무용장면들은 사람들의 심금을 충분히 울리기에 족하다고까지 평가했다.

이 무용극의 각본/연출을 맡은 이는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창건과 더불어 무용예술의 화원에 입문하여 무용배우로부터 무용안무가로 성장하면서 40여년의 중국조선족 무용창작을 이끌어온 “탁월한 무용가”이자 이름난 안무가인 최옥주씨다.

우리는 “춘향전”에서 이름난 로일대 조선족무용가 최옥주의 심후한 공력을 보아내게 되였다. 녀성군무든 녀성독무나를 막론하고 우리로 하여금 순수한 조선족의 전형적인 동작들을 감상하게 하였으며 특히는 조선족의 향기가 물씬한 동작의 변형과 발전들을 포착하게 하였다. 찬탄을 자아내는것은 많고많은 녀성군무를 등장시키면서도 동일한 무대화면속에서 기복을 이루게 하고 엇갈린 배렬이 제법 정취있으면서 순수한 중국교향곡안무법의 진맛을 체현한 그것이다. “춘향전”의 성공은 “그 어떤 소수민족의 무용어휘로는 대형무용극을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사람들의 초심을 바꾸어버렸다.”

당시 아시안게임예술축제에서 선보인 “춘향전”을 보고 중국의 이름난 무용평론가이며 리론가인 구건평 중국예술연구원 무용연구소 소장이 내놓은 진솔한 평가다.

최옥주씨의60여년의 무용인생을 살펴보면 그가 직접 출연한 무용 혹은 그녀가 창작한 주옥같은 무용작품들은 높은 예술적품위과 독창적인 안무로 하여 중국조선족 무용사에서 찬란히 빛을 발하고있다.

★무용은 후회없는 선택이였고 삶의 전부였다

1935년1월8일 룡정에서 태여난 최옥주는1950년 도문시에서 중학교졸업을 앞두고 연변가무단의 무용배우모집에 응시했는데 이악스러운 정신력과 간절한 소원을 담은 체조동작들로 시험관들의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30여명의 신입연기자 가운데 유일하게 체조동작으로 무용에 입문한 최옥주는 단기고찰뒤 정식단원에서 배제된다. 연변가무단에서 나가야 될 무렵, 공교롭게 연변가무단의 문서관리인원이 출장중이여서 최옥주는 잠시 자리를 지키게 되였다. 이 기회를 놓질수 없었다. 하여 그녀는 체면을 무릎쓰고 기능훈련에 달라붙는 한편 가무단에서 출연하는 모든 종목들을 어깨넘어로 익혀왔다. 기회는 준비한 자에게 차례진다는 말은 최옥주를 두고 한 말인듯 싶었다. 연변가무단의 중요한 공연을 앞두고 쌍무배우가 병으로 무대에 오를수 없게 되였는데 이는 최옥주에게 절호의 기회로 되였으며 최옥주는 그번 무대에서 자신의 천부적인 예술잠재력을 충분히 보여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다시 연변가무단의 무용배우로 남게 되고 “농악무”, “물동이춤”, “목동과 처녀”, “웽그리아쌍무” 등 무용의 주역을 맡게 되였다.

1957년 연변예술학교 무용교원으로 전근된 그녀는 1960년에 중국 무용계의 최고학부인 북경무용학원에 연수생으로 파견된다. 이 기간 최옥주는 무용, 음악, 미술 등 면의 지식들을 폭넓게 접촉하면서 무용은 단순한 인체의 움직임인것이 아니라 시적인 형상으로 인간의 미를 창조한다는 무용예술의 도리를 터득하게 되며 점차 여 안무가의 꿈을 키워가게 된다.

2년간의 연수뒤 연변으로 돌아온 최옥주는 안무가의 꿈을 위해 다시 연변가무단에 들어가 무용배우로부터 새로운 출발을 한다. 이 기간 최옥주는 1962년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10돐 기념 공연에서 독무 “양모는 처녀”, “긴 수건춤”, 쌍무 “목가” 등 절목에 출연하여 우수배우상을 수상했고 1963년에는 첫 작품 “이남박춤”을 창작했다. 1964년 그녀는 녀성군무 “왕가물과 싸우는 처녀들”(연길현문공단 원작, 최옥주 개편)을 안무하여 전국과외예술콩클에 내놓았는데 우수종목으로 선정됐다.

한창 안무계에 두각을 내밀기 시작할 때 전례없는 “10년 동란”은 그녀의 창작 자유를 박탈하고 그녀를 로동개조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1971년 “로동개조”를 맞치고 다시 연변가무단에 돌아 오게 된 최옥주는 재차 높은 창작의지를 보였다. 이 기간 군민의 정을 형상한 군무 “김치에 깃든 옹군의 정”, 농촌처녀의 진지한 로동생활을 표사한 독무 “양돈처녀”, 림업로동자들의 생산열정을 예술적으로 구가한 남성군무 “벌목공” 등 작품들을 창작, 안무하여 무대에 올렸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비록 당시 정치환경의 영향을 받아 민족성과 예술성에서 미흡한 점들을 보였지만 현실생활을 토대로 한 독창적인 무용예술을 표현한것으로 하여 그녀의 조선족 무용 안무가의 위치를 수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으며 전국 무용계에도 비교적 큰 영향을 주었다.

70년대말부터 시작된 개혁개방은 최옥주가 새로운 예술의 경지에로 오르는데 창작의 자유를 선물했다. 그녀는 “무용은 단순한 인체의 움직이 아니라 시적인 형상으로 인간의 미를 창조하는것이다”는 자신의 무용철학을 토대로 근로한 농민의 내심세계를 형상한 군무 “논물관리원”을 창작, 안무하였으며 전통적인 민속인 “갓춤”을 바탕으로 해학적이고 유모아적인 표현수법을 무용창작에 도입하여 새시대의 생활면모를 반영한 남성군무 “분배받은 기쁨”을 안무하였는데 전국예술콩클에서 창작1등상과 2등상을 수상하였다. 그녀가 서정적인 안무수법으로 청춘남녀의 리상을 형상화한 무용서정시 “푸른숲 설레이네”는 전국무대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조선족 안무가인 최옥주의 이름을 한층 부각했다.

이같은 성과와 예술재능으로 1982년 최옥주는 국가문화부로부터 대형혁명력사서사시 “중국혁명의 노래”창작그룹에 초빙되여 국내 유명한 무용안무가들과 어깨 나란히 중국무용력사에 기록을 남기게 되였다. 이해 9월에는 중국을 대표하여 유네스코에서 주최한 “아세아지역 민간 및 전통 무용 보호발전 심포지엄”에 참가하여 “시대정신과 민족형식이 결합된 무용예술을 창조하자”라는 론문을 발표하였으며 1983년에는 중국 조선족예술단을 인솔하여 일본에서 개최된 제3회 “비단의 길”예술제에 참가하였고1985년에는 중국무용가협회 주석단위원의 명의로 오스트랄리아에서의 예술고찰활동을 진행하였다. 다년간의 국제교류와 광범위한 예술활동은 최옥주의 민족자부심과 민족예술가의 사명감을 한층 부각시켰다.

★“뿌리없는 민족예술은 존재가치가 없다”

최옥주의 무용이나 그가 직접 창작, 안무한 무용, 대형무용극을 보면 거개가 우리 민족의 정서를 반영하고있다. 그녀는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이라는 말을 항상 기억하고있다. 또 민족적인것에 시대적인것을 가미한 작품을 주장한다.

“전통과 현대의식이 결합된 조선족무용은 고전에 너무 젖은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꿈과 하나의 세계라는 주류사회와 시대적인 맥박에 절주를 맞추자면 민족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사람들의 심미관념, 심미요소가 날따라 변하고있는 형편에서 민족의식, 현대의식과 시대감을 부여하여야 하는데 타민족까지 즐길수 있는 독특한 흠상요구에 초점을 겨냥한 예술형식, 멋과 혼이 결여된다면 대동소이한 작품일수밖에 없다. 력사의 흔적에 뿌리를 두고 짙은 민족색채, 짙은 민족풍격을 시대의 심미요구에 차분하게 담아야 진품을 낳을수 있다. 나는 력사학자가 아니지만 력사의 흔적을 무용작품에 담아 전통을 계승하는것은 안무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각한것이 대형무용극 “춘향전”에서 보여준 고구려벽화와 같은 우리 민족의 력사와 문화의 흔적들이다.

1986년 최옥주는 조선민족의 력사이야기인 “춘향전”을 모델로 대형군무 “춘향과 리몽룡”을 안무하는 과정에 이야기의 예술성과 민족적인 정서에 매혹되여 앞으로 “춘향전”을 중국 조선족의 첫 대형민족무용극으로 개작하려는 마음을 다지게 되였으며 꾸준한 자료수집과 예술구상에 들어갔다. 1990년 북경에서 개최된 제11회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마련된 예술제는 그녀의 구상을 현실화한 마당이였다. 그번 “북경아시안게임 예술제” 페막공연에서 1등상을 수상한 대형무용극 “춘향전”은 최옥주의 무용창작에서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였고 중국 조선족무용사에서 대형무용극창작의 새로운 기원을 열어놓은 리정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당시 국가문화부 부부장 하경지는 “무용극 <춘향전>을 좀 더 가공하고 다듬는다면 중국 일류의 무용극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높이 평가하였으며 중국 “무용”잡지는 “아시안게임 상공에 높이 뜬 하나의 밝은 별”이라는 표제하에 대형무용극 “춘향전”의 예술창조성과 공연성과를 대폭 소개하기도 했다.

대형민족무용극 “춘향전”은 그 독특한 창조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아 1991년 문화부 제1차 “문화대상”과 안무상, 음악상을 비롯하여 8 개의 상을 석권했고1992년 길림성 제3회 “장백산문예상” 우수상을 수여받았으며1994년 한국 남원에서 있은 제64회 “춘향제”에 참가해 좋은 평판을 받았고 최옥주선생도 남원축제위원회로부터 문화대상을 받아안았다. “춘향전”은 창작된이래 60여차의 공연을 가졌는데 공연마다 절찬을 받았다.

★끝을 보지 않고 달려가는 민족무용의 인생

1995년 최옥주는 정년퇴직한다. 비록 퇴직은 했지만 그토록 애착하고 심혈을 기울여온 생명과도 같은 무용을 그대로 접을수 없었다. 하여 정부와 사회 각계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하에 “최옥주무용연구소”를 세우고 자신이 평생에 쌓아온 예술재질을 후대들에게 전수하기로 작심했다. 그렇게 양성받은 학원생이 50여명에 달한다. 이 기간 최옥주는 “물동이 춤”, “부채춤”, “갓춤”, “봉선화” 등 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 공연하여 자신의 예술생애를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현재 자기의 예술경력과 관련된 화책을 준비중이라는 최옥주씨. 그 화첩에는 연변의 무용사에서 한세대를 풍미하면서 굵은 획을 그어온 고 조득현선생도 등장하고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인 김혜련선생님도 등장한다. 최옥주씨의 말을 빈다면 중국 조선족 100년 무용력사를 반영하는 화첩이라는것이다.

최옥주는 선후로 중국무용가협회주석단성원, 중국 소수민족무용가학회 부회장, 길림성무용가협회 부주석, 길림성정치협상회 위원, 연변무용가협회 주석, 연변문학예술 계련합회 부주석, 연변조선족자치주정협 상무위원 등 사회직무를 담임하였으며 “중국예술가사전”, “고금중외 녀성명인사전”, “중국 유명문학예술가사전”에 이름을 기록했다. 그녀가 자신의 연구성과와 착작경험들을 정리하여 발표한 “새롭고 독창적인 무용형상을 창조하기까지”, “무용언어의 개성창조”, “정감 화폭 시”, “무용작품의 생명력은 독특한 민족개성에 있다”, “무용 분배받은 기쁨의 창작소감”, “무용예술의 갱신을 두고”와 같은 수십편의 론문들은 후대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남고있다.

1983-일본 동경 제3차 비단길 음악회공연에 참가하여 무용 "금파도 설레이네"(자편자연)으로 일본 21개도시 57회공연을 하였다.
1990년 아시아예술제에 참가한 최옥주(웃줄 오른쪽 네번째 최옥주)등 소수민족대표들이 강택민, 리붕, 만리 등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1980년 만리총리 접견을 받고있는 최옥주.
2003년 북경 최옥주(오른쪽 세번째)무용학교를 찾아주신 조남기, 리덕수.
물동이춤
춘향전
1978년 북경에서 공연한 "푸른슾 설레이네".
1994-한국 64계 춘향제에 참가하여 금메달과 춘향문화대상을 수상
래원: 길림신문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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