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23)
2016년 05월 20일 13:51【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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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눈 어두운 사격능수
리대성이는 키가 1메터 80센치나 되는 꺽다리로서 경상북도 대구사람이다. 그는 년상약한 둘째조카 리동호와 군관학교의 동기동창이였으며 후에 역시 그 조카하고 둘이 함께 팔로군에 참군하였다. 그러나 죽을 때만은 저 혼자 죽었다. 1950년 가을 조선전장에서.
항일전쟁시기 리대성이는 사격능수로 이름이 높이 났었다. 그리고 그는 또 눈을 가리거나 밤에 불을 켜지 않고도 기관총을 완전히 분해했다가 도로 들이맞추는 재주까지 있었다.(나는 원체 둘한편이라서 여러해 걸려서도 종시 그 재주를 배우지 못하고말았으니 죽어도 두손은 관밖에 내놓아야 할가보다.) 한데 이 리대성이에게 두가지 남다른 병집이 있으니 그 하나는 생리적인것이요, 다른 하나는 성격상의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성격상의것부터 피로하기로 하자.
리대성이는 만년필에 대해서 특이한 흥취를 가지고있었다. 무릇 그 눈에 띄는 범위안의 만년필이기만 하면 누구의것이거나를 막론하고 한번 갖다 분해해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아무리 새로 산 고급만년필이라도—파커나 워터맨이라도—그에게 한번 내맡겨서 속시원히 뜯어보게 하지 않고는 다들 배겨내지를 못하였다. 노끈으로 매서 밤낮 목에다 걸고 다니기나 하면 모를가. 자는 동안에 임자에게서 무단히 갖다가 실컷 뜯어보고는 도로 맞추어 이튿날 돌려주는게 그의 습성이였으니까. 그리고 또 거기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감정이 하나씩 붙는 법이였으니까.
“아무 이상 없소.”
또는 “병집이 있는걸 내가 고쳐놓았으니 인제 잘 써질게요.”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손이나 옷자락에는 항시 잉크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다. 하여 그것들은 그의 “명승고적”이 되다싶이 하였다.
다음에는 리대성의 생리적인 병집에 대해서 서술해보기로 하자.
리대성이가 그의 명중률이 놀랄만큼 높은 저격탄으로 적들에게 본때를 보이는것은 아침에 해가 떠서 저녁에 해가 지는 그 어간 즉 낮에 한하였었다. 일단 날이 저물기만 하면 그는 맥을 못썼다. 아주 페물이 되여버렸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밤눈이 어두운 야맹증환자였던것이다. 아무리 사나운 싸움닭도 해가 지면 어쩌지를 못하는것과 같은 리치였다. 그러므로 밤행군은 그에게 있어서 저승으로 들어가는 귀관으로 되였다. 하여 비타민A와 돼지간을 숱하게 먹었건만 웬 까닭인지 도무지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모지락스러운 야맹증은 그 식이 장식으로 계속 그를 괴롭혔다. 그러니 그가 어찌 고민을 하지 않을건가!
밤에 행군을 하게 되면 그는—낮에 용맹을 떨치던 그는—청맹과니처럼 그저 앞사람이 하는대로 따라하는수 밖에 없었다. 앞의 사람이 멎어서면 저도 따라서 멎어서고 또 앞의 사람이 물도랑을 뛰여건느면 저도 따라서 뛰여건너야만 하였다. 몹쓸 장난은 여기서 시작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