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23)
2016년 05월 20일 13:51【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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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
호유백의 본이름은 모르지만 별명이 “대추씨”인것을 나는 안다. 옹골차게 여물었다는 뜻이겠지. 경상도사투리가 심한 친구로서 남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말로 폭포수같이 열변을 내리쏟을 때는 가관이다. 정의감이 강한데다가 입까지 바르기때문에 친구들의 오해를 사는 경우도 종종 있기는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것이 그의 성미다. 그렇기에 죽을 때도 그처럼 당차게, 통쾌하게, 멋지게 죽었지. 태항산에서 적군에게 포위를 당하여 도저히 짓치고 나갈 가망이 없게 되자 그는 투항하라고 손짓하는 적들에게 코웃음을 던지고 마지막 한알 남은 권총탄으로 제 관자노리를 쏘아뚫고 죽어버렸다. 그는 단 한알의 총알도 적에게 거저 주지는 않았다. (옜다, 이놈들아, 가져갈테면 내 송장이나 가져가라!) 하는 심사였을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비타협의 화신이였다. 원쑤들과는 절대로 한하늘을 머리에 이지 못하는 사나이대장부였다. 진짜 혁명자였다. 공산주의자였다. 볼쉐비크였다.
“7.7”사변전에 그가 남경에서 사업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하관정거장에 손님(상해에서 지하공작을 하는 동지—심운)을 마중하러 나갔다. 짙은 회색의 다부살(중국식두루마기)을 입고 검은 안경을 쓰고 나갔건만 홈에서 불여우같은 일본총령사관 밀정놈에게 발각이 되였다. 그놈은 조선총독부에서 특별임무를 맡고 전직이 되여와 전문으로 조선망명자들을 다루는 놈으로서 조선말을 해도 이만저만 잘하지 않았다.
호유백이는 눈치를 차리고 될수 있으면 그놈과 멀어지려고 마음을 썼다. 허나 그놈은 아무 일도 없는듯이 딴전을 펴며 슬렁슬렁 걸어서 호유백의 옆을 스쳐지나가는체하더니 갑자기 홱 돌아서서 싱글벙글 웃으며
“조선분이시지요?”
하고 나직이 조선말로 묻는것이였다.
호유백이는 졸지에 그런 돌연적습격을 받고 당황망조하여 아니라는 뜻으로 연해 고개를 흔들며
“아니, 아니…”
하고 중국말로 부인을 하였다. 밀정놈은 호유백의 그 간접적인 긍정적대답을 듣고 대단히 만족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싱글벙글하였다. 호유백이가 정말로 조선말을 모르는 사람이였다면 “뭐요?” 혹은 “뭐라구요?” 하고 되물어야 하였을것이기때문이다.
나중에 호유백은 열적은 태도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자기가 얼간이노릇을 하였음을 승인하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를 놀려줄 때 다른 말은 안하고 그저 “아니, 아니…” 하기만 하면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