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24)
2016년 05월 23일 13:22【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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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대리인
중일 량국이 교전을 하는데 우리 조선의용군은 중국편에 선 까닭에 그 가족들은 례외없이 다 조선 저쪽에 살고있었다. 하여 로구교사변이 발생한이래, 찍어서 말하면 “8.13”이래, 우리는 모두 가족들과의 련신이 끊기였다. 아무리 밤낮없이 총을 들고 전장을 달려다니기는 해도 역시 더운 피가 몸속에 흐르는 사람들인만큼 부모형제를 그리는 마음이야 어찌 없을것인가. 더구나 부모들은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자식들의 소식을 몰라서 주야로 속을 태울것이 아닌가. 옛사람도 “봉화련삼월 가서저만금(烽火连三月, 家书抵万金)”, 즉 전쟁이 오래도록 그치지 아니하니 집소식이 귀하기가 만냥 값이 나간다고 하잖았던가.
바로 이런 시기에 조선의용대 제2지대 락양분대의 분대장 문정일이가 특수한 역할을 놀게 되였다. 그가 우리들의 우편대리인으로 된것이다. 당시 그는 제1전구 위립황의 장관사령부에 주재해있으면서 조선의 가족들과 서신거래를 할수 있는 구멍수를 뚫어낸것이였다. 그 구멍수란 별게 아니라 프랑스제국주의의 강도질에 힘입는것이였다. 당시 중국은 반식민지상태에 놓여있었으므로 그 우정권은 몽땅 프랑스제국주의의 손아귀에 들어가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일본강도는 아직 프랑스강도에게 득죄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이 가능하였던것이다.(프랑스국기—삼색기발을 날리는 우편렬차가 중일 량군이 대치한 전선을 거침없이 통과하는것을 나는 여러번 보았다.)
나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러해만에 집에다 편지를 썼다. 당시 나는 호북 로하구에 있었다. 한데 나중에 알고본즉 문정일이는 우편물검사에 통과되기 쉽게 하느라고 우리의 조선문편지들을 일일이 다 한문편지로 번역을 해가지고 부쳤던것이다. 수고스럽게도! 내 그 외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을 때 우리 누이동생 성자는 서울 어느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다. 하지만 그런 백화체한문으로 내리쓴 글을 보아낸다는 재간이 있어야지. 하여 할수없이 화교가 경영하는 어느 주단포목점에를 들고 가서 좀 보아달라고 청을 들었더니 서사인듯싶은 사람이 두말없이 받아들고 조선말로 번역을 해가며 찬찬히 읽어주더라는것이다. 이것은 물론 해방후에 내가 누이동생 집에 가서야 비로소 안 일이다.
달포 좋이 지나서 나는 반갑게도 문정일의 손을 거쳐서 온 우리 누이동생의 회신을 받았을뿐아니라 피차에 련신이 없이 지내던 둘째사촌형의 편지까지를 받게 되였다. 이와 동시에 김영만이도 그 고향 함경남도 고원에서 부친 큰형님의 답장을 받았다. 하지만 그 편지들때문에 김영만이와 나는 공연히 울도웃도 못할 웃음거리로 되였다.
서술의 편리로 우리 누이동생의 편지는 잠시 놓아두고 우선 우리 사촌형과 김영만이 맏형의 편지부터 피로하기로 하자.
우리 사촌형은 그 편지에서 나를 면려하기를 “동생, 우리는 동심협력해서 동아신질서의 확립을 위해 분투하세…” 운운. 우리 그 사촌형은 일본학교를 졸업한후 줄곧 일본인이 경영하는 무슨 주식회사에 근무하고있었다. 한데 그가 말하는 이른바 “동아신질서”란 일본제국주의가 침략을 할 목적으로 내건 구호로서 후에 내놓은 “대동아공영권”의 추형임은 세상이 다 아는바이다. 한데도 그는 제 사촌아우가 항일전사인것도 잊고있었던 모양이지!
한편 김영만의 맏형은 그 편지에서 제 동생을 타이르기를
“우리는 이미 창씨를 해서 ‘가나야마’가 되였으니 동생도 앞으로는 김씨성을 쓰지 말고 ‘가나야마(金山)’를 쓰도록 하게. 명심하기 바라네…” 운운. 이른바 창씨라는것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민족의 얼을 말살하기 위해서 조작해낸 망발이다. 한데도 그 큰형님이란 량반은 제 아우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아마 모르고있었던 모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