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25)
2016년 05월 24일 13:35【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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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의 길에서
희성이기는 하지만 조선에도 왕씨, 공씨가 있다는 말을 들은적은 있어도 실지로 공씨성 가진 조선사람을 알게 된것은 항일전쟁시기의 무한에서였다. 공명운(공명우)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키가 호리호리한, 고집이 몹시 센 젊은이였다. 그는 일찌기 적색로조(赤色劳组)의 삐라살포사건으로 붙들려들어가 2년간의 옥고를 치르고나서 역시 8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을 한 한빙동지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하는 길에 오르게 되였다.
한빙과 공명운은 중국말을 한마디도 몰랐다. 밥을 먹는다는 말도 몰라서 손짓으로 형용을 해야 할 그런 정도였다. 그저 눈치놀음으로
돈을 치르는데 눈짐작에 한 오륙십전 돼보이는거면 1원짜리를 내주어서 거스름돈이 얼마인가를 보아 속으로 (어, 80전짜리였구나! 혹은 90전짜리였구나… 거 되우 비싸다!) 할뿐이였다. 그들에게만은 중국의 물가가 예상외로 비쌌다. 그도 그럴것이 약아빠진 장사아치들이 그들 같은 벙어리놈을 속여먹지 않고 또 누구를 속여먹을것인가. 그러는 동안에 본래도 얼마 되지 않던 호주머니속의 지전은 차츰 줄어들고 그 대신에 거슬러받은 각전—은전, 동전은 자꾸 늘어나서 조금만 들썩여도 절렁절렁 소리를 내여 자기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였다. 그들의 로자는 당시 국내에서 명성을 떨치던 허변호사의 부인이 마련해준것이였다. 그 부인은 자기 딸과 환난을 같이하는 동지라고 해서 한빙을 친자식처럼 보살펴주었던것이다.
두 망명객—한빙과 공명운이가 단출한 행장을 챙겨들고 홈에 내려서니 거기는 곧 그들이 타고 온 직행렬차의 종착역인 북평전문정거장이였다. 한데 두 사람이 역구내를 나와보니 정문어구에 생각잖은 일본헌병 두놈이 서있잖은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북평도 역시 안전한 곳은 못되였다. 려객들이 쏟아져나오는것을 보자 기러기진을 치고 대기하던 인력거군들이 우 몰려와서 제각기 손님을 끌었다. 한빙은 한시바삐 일본헌병의 이목을 피할 생각으로 얼른 제일 가까이 놓인 인력거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공명운더러도 얼른 하나 잡아타라고 눈짓을 하였다. 허나 뜻밖에도 그 공명운은 올라탈념을 안하고 거기 그대로 버티고 서서 단호히
“난 싫습니다! 사람이 끄는 차를 사람이 어떻게 탄단 말입니까, 난 싫습니다.”
하고 거절을 하는것이였다.
한빙은 속이 달아서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어서 올라타라고 입짓코짓을 다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인간의 존엄을 멸시하는 일… 난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단마디로 거절을 하는 공명운의 혁명적인도주의는 가히 “좌익”소아병의 전범이라고도 할만하였다.
이때 저쪽에 서있던 일본헌병 한놈이 무슨 낌새를 채고 패검을 절렁거리며 저벅저벅 걸어왔다. 영문을 모르는 인력거군들은 공연히 또 헌병놈 구두발에 걷어채일가봐 얼른 올라타라고 재촉재촉을 하였다. 헌병놈은 가까이 와서 걸음을 멈추더니 인력거에 앉아있는 한빙에게 눈방울을 굴리며 기찰을 하였다.
“무슨 일이야?”
한빙은 일이 꼬일가봐 얼른 인력거에서 내려와서 공명운을 가리켜보이며 웃는 낯으로 둘러대였다.
“저 사람이 돈이 아까와서 인력거를 타지 않겠다기에 지금 달래는중입니다.”